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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여백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어딘가 빈 구석이 있는, 세상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바람과 같은 사람이 좋다. 계절로 치자면 겨울과 같은 사람이다. 하여, 언젠가부터 나는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다. 낙엽이 지는 것이 아니라 여백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쓰셨던 박경리 작가처럼 삶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월이 더해질수록 여백이 드러나는 삶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삶의 여백은 겨울의 눈밭이요, 지고지순한 '자유'의 등가어이다. 조르바가 그랬듯 인간은 곧 자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유를,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요즘 내 삶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지식의 짐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는 게 힘'이라는 젊은 시절의 구호는 나이가 들며 차츰 흐릿해진다. 즐거운 일이다.
이윤기 님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었다. 어제, 오늘 중국발 미세먼지로 한반도가 몸살을 앓는 마당에 한가하게 책 나부랭이를 붙잡고 앉아있는 것도 물색없는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책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윤기 작가의 빼어난 글솜씨에 어찌 빠져들지 않을 것인가. 우리나라 번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이윤기 작가. 내가 작가의 글을 처음 읽었던 것은 모르긴 몰라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글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매끄럽던지 번역서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작가로 인해 행복했었다.
"'글 읽기'에 관한 한 나는 황희 정승만큼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관한 한 행복하지 못하다. 길고 짧은 소설을 차례로 써내고 있지만 조금도 행복하지 못하다. 나는 큰 빚을 진 사람이다. 나에게 '글 읽기'의 행복을 안겨준 많은 작가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다. 부모의 사랑을 아래로 갚듯이 이 빚은 독자에게 갚아야 한다." (p.36)
이 책이 나오기 전 나는 작가가 쓴 산문집은 모두 읽었었다. <이윤기가 건너는 강>과 <무지개와 프리즘>, <시간의 강>과 <어른의 학교> 등. 나는 그들 산문집 중에 지금은 품절이 된 <무지개와 프리즘>을 유난히 좋아했다. 못 쓰는 글이지만 리뷰도 썼었다 (http://blog.aladin.co.kr/760404134/5191455).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그 책에서도 작가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작가 자신에 대해 말했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일본어와 영어를 배웠다는 작가에게 번역일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 책에서 모국어로서의 한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었다. 나의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며 읽었는데 웬걸 작가가 그동안 썼던 여러 책들에서 발췌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게 아닌가. 책에 대한 실망에 앞서 좋아하는 책도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읽지 않는, 되는 대로 설렁설렁 읽고는 쉽게 치워버리는 나의 잘못된 독서습관이 부끄러웠다. 한 권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 닳도록 사전을 뒤졌을 작가의 치밀함이 눈에 선하다.
"외국어 번역 공부, 나는 참 어렵게 했다.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많이 절망했을 뿐, 한 번도 만족을 경험하지 못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을 많이, 그리고 오래 걸었다. 판화가 이철수는 길을 잃고 오래 걸으면 그게 곧 길이 되는 수도 있다고 위로하고, 시인 강연호는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격려하지만 그 위로와 격려는 들을 때마다 슬프다." (p.116)
번역가 김석희 님도 그의 책 <번역가의 서재>에서 말하길 '지금도 일감을 앞에 두면 막막한 기분에 휩싸인다'고 했다. 글을 쓰는 일, 책을 번역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변화시켜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일일 터이다. 천지개벽의 주체인 것이다. 한 편의 글을 너무도 쉽게, 낙서하듯 쓰는 나의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어제, 그제 중국발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았던 한반도는 이제 얼마쯤 제 모습을 되찾고 있다. 육신을 구제하기 위한 삶의 찌꺼기도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체에게 저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깊이 사유하지 않은 영혼의 찌꺼기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병들게 할 것인가. 짧은 글이라도 허투루 쓸 게 아니다. 정성을 다하여 책을 읽고, 깊이 사유하여 쓴 글이었음에도 작가는 자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는데 나는 도통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다. 반성하며 이 글을 쓴다.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