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와 프리즘 - 양장본
이윤기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주말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는 집을 지키는 아내에게는 '하필이면...'하는 푸념이 나올 법한 소식이겠지만 일주일 내내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일상사에 지친 직장인에게는 그보다 더한 호사도 없다.  모처럼의 늦잠도, 딱히 볼 것도 없는 채널을 빙빙 돌리는 일도, 느긋하게 웹서핑을 즐기는 일도 비를 핑계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도가 지나치면 외출길이 막힌 아내의 뒤틀린 심사가 불호령으로 떨어지기 일쑤이지만 적당한 선에서는 모른 체 눈 감아주는 것도 일반적이다.  나는 이런 빈 시간이 좋다.  어떤 계획도 없이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이런 시간은 어림짐작으로 셈해 보아도 일 년을 통 털어 며칠 되지 않는다.

기상청의 예보대로 간밤에는 비가 촉촉히 내렸다.
그 적은 비에도 우수수 떨어진 낙엽으로 거리는 온통 가을이다.  노란 은행잎이 앙상한 가지 위에서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다.  사람의 운명도 저렇게 제각각인 것을...
혼자만의 생각이 깊어지는 이런 시간에, 또는 바쁘다는 이유로 언제나 뒷전으로 밀렸던 여러 잡스러운 생각으로 서성이는 시간이면 일부러 찾아 읽는 글들이 있다.

도무지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뒤엉킨 상념들로 편안하게 망설일 수 있는 시간,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과의 어정쩡한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무엇이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촉각을 잃은 듯한 비현실적 순간에 나는 이윤기의 산문집을 틀어 잡고 아무렇게나 읽어 버리기 일쑤다. 아무렇게나 읽다가 그냥 문득 털어버리고 다시 나의 시간들을 가곤 하는, 그의 글에 대하여 나는 왜 이런 무작정이며 막연한 습관을 들였을까.
 
편안함일 것이다. 쉽고 친숙한 사람에게 생각 날 때 찾아가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돌아오는 것만으로 마음이 어느 정도는 편안해지는 것처럼, 아무 때나 찾아 읽고 편안해지거나 무언가 지금 해야겠다는 자발적인 힘이 돋게 하는 책이지 아마. 며칠 전에 읽었던 <오래된 새책>에는 이윤기의 소설 <하늘의 문>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책의 저자 박균호는 자신의 책 수집 인생에서 가장 떨리는 순간은 이 책을 손에 넣었을 때라고 말했다. 

나는 이윤기의 소설은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아니 읽지 않았다.  <시간의 눈금>, <이윤기가 건너는 강>, <어른의 학교> 등 그의 산문집만으로도 그동안 나는 충분히 행복했었다.  내 사색의 공간에 짐이 될까 저어하여 책 사기를 꺼려왔는데 <오래된 새 책>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이윤기의 산문집 한 권을 더하였다.  <무지개와 프리즘>.  제1부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 - 인물 기행을 위한 야간 비행, 제2부 신화는 힘이 세다 - '인간의 꿈과 진실'에 대한 생각, 제3부 청년들에게 고함 - 문화에 대한 짧은 글 모음, 제4부 꿈이 너무 큰가요-후기를 대신해서 등 총 4부로 구성된 이윤기의 대표적 산문집이다.  이 산문집은 전체적으로 농익은 저자의 글맛과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자의식을 높이 세우는 자존심 강한 글들이 실려있다.

소설 공부 중에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정독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다고 믿는 작가는 사유의 연습 같은 것에 대한 집착으로 번역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번역을 통하여 더할 나위 없는 정독의 방법을 배웠다고도 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명화를 오려 이것을 화풍에 따라 분류함으로써 그림을 배우고 음악 감상실을 무시로 드나들며 작곡가와 작품을 외웠다는 작가의 집요함은 글에서도 오롯이 드러난다.

"우리 시대의 전문가들은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친절을 보이지 않는다.  그 전문 분야의 진화과정을 찬찬히 설명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친절 같은 것은 절대로 베풀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인문의 향기, 사람의 향기가 등천을 할 텐데도 그러지 않는다.  그러지 않는 게 아니라 그렇게 못한다.  다른 분야 사람들에게는 물론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끼리도 애정어린 대화는 오래 나누지 않는다.  말이 막히면 고스톱이다.  포커다.  박노해의 말마따나 '사람만이 희망'일 것인데도 모이면 가라오케다.  물러가라.  다 물러간 자리에 새 판을 짤 수 있게."  (P.314)

짙은 우수처럼 잔뜩 찌푸린 하늘.  비는 오지 않는다.  그런 오후를 무작정의 빈 마음이 흐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