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권력구조는 국민이 저항을 통해 바꿔야 한다" 

1994년, 데이비드 바사미언과 촘스키의 대화로 엮은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는 12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 그 어떤 책보다 가치있고 유효하다. 현재 이명박정부가 벌이고 있는 모든 정책(공공기관의 민영화, 재벌위주의 정책, 신자유주의 경제등등)이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암울한 암흑으로 덮어버릴수 있는가를 그리고 권력과 부을 움켜진 자들이 어떻게 국민을 기만하고 독재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난 이 책 읽으면서 이책의 내용과 현재 우리 상황이 너무나 맞아 떨어져 촘스키가 무슨 예언가인줄 알았다. 노스트라다무스 저리 가라다.)


확실히 촘스키는 중도노선의 지식인은 아니다. 그의 학문적 지식과 통찰력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를 위해 사용하고 있지 않다. 학문적 헤게모니를 가진 지식인으로서 지배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고 그들의 비리와 남용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현재 지배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정확성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침 튀겨가며 단언하건데,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권력을 쥔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아무리 정책이 잘 못 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기묘한 말 바꾸기와 선동은 국민의 정확한 판단을 마비시킨다. 거기에다 언론까지 정부의 기만에 합세하면 국민은 그저 믿고 따를 수 밖에 없다. 괜시리 정부나 정부기관을 영어로 Authority 라고 불리지 않는다. 권위, 권한이라고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정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authority의 밑바탕에는 국민이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정부(또는 기관) 즉 authority라고 한다. 

국민을 전폭적인 신뢰와 기반을 바탕으로 한 주제에 authority는 이제 국민을 등에 업고 세상의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몇 명의 권력을 움켜진 자들은 부와 결탁하여 멋모르는 국민들을 우롱하고 장악하려 하는 것이다. 미국쇠고기가 싸고 맛 좋으니깐 미국이 주는 대로 광우병에 상관없이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입 닥치고 먹으라고 하는 것은 국민을 권력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는 국민은 양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자신들을 따라야하는 양같은 존재. 우리 국민이 찍소리도 못하고 주는 대로 풀이나 뜯어먹는 양같은 존재로 남아야할지 한 번 생각해보고 넘겨할 문제일 것이다. 

며칠 전에 미드 <Law&order SVU> 9x17 에서 Merritt Rook라는 역활로 출연한 로빈 윌리엄스는 자신의 신분을 경찰로 가장하여 해피버거라는 매장에 전화를 걸어 매니저에게 점원중의 한명이 고객의 돈을 훔쳤으니 자신을 기다리는 동안 그 여점원의 옷을 벗기고 손발을 묶으라고 전화로 명령한다. 매니저는 경찰이라는 말에 전혀 의심하지 않고 명령에 따라 시키는 대로 한다. 하지만 매장에 들이닥힌 것은 실제 경찰이었고 매니저는 취조받는 과정에서 가짜 경철 전화 한통화에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사하는 과정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진짜 범인임을 알고 로빈을 체포해 법정에 세운다. 하지만 로빈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체포한 벤슨형사나 엘리엇 형사를 그리고 자신을 법정에 세운 노박검사를 탓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양이 양치기를 따르 듯 명령을 따를 뿐이다. 우리는 양이 되서 위험에 빠져도 맹목적으로 따를 뿐 authority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라고. 로빈은 배심원들에게 아니 시청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양이 되지 말라. 스스로 생각하라" 고 말이다. 일반 대중보다 한사람의 세계적인 연예인이 던지는 말 한마디가 핵과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때, 로빈이 범인으로 나와 한 말이지만 그의 그 말은 엄청난 의미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국민 한사람 한 사람이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나 기관을 완전히 믿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왜 그렇게 해야만 하고 우리가 따라야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파는 국민의 의문부호를 싫어한다. 촘스키가 우파는 국민이 도서관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말한 데는 의문부호에 대한 정확한 답을 회피하고 자신의 지배권력을 확고히 다져놓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로빈 윌리엄스의 법정변호의 말이나 촘스키의 지배 세력에 대한 비판은 상하 명령의 지배체계를 효율적으로 국민을 관리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변질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싸워 세상을 변화시켜야한다는 것으로 난 받아들였다. 세상이 권력자나 부자들에게 치우쳐가는 것이 아니고 촘스키가 말하는 공익(common good)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서서히 변화시킬 수 있다면 좌파니 우파니하는 말장난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우스운 꼴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검역시스템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나라고 국민 한 사람이라도 의문을 던진다면 정부는 그 의문에 답을 해야하는 것이 정석이다. 뻑하면 반미니 좌파니하며 얼렁뚱땅 몰아세우며 너희 국민들을 이해 못하겠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에 정확한 답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를 희생해가면서 소수의 단기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65p)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보면서 정부나 기관의 신뢰도가 낮아졌다. 이제 난 정부가 내 놓는 정책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모를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의문정도가 아니라 흑과 백 그리고 그 중간지점인 회색도 못 믿을 정도가 되었으니, 이게 다 정부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지면서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의 정치적 정체성은,경상도 b급좌파 남편을 만나기전만 해도 무뇌아 수준이었다. 투표권이 내 앞으로 떨어진 그 순간부터 난 친정부모의 강권에 못이겨 한나라당에 표을 던졌다. 지금에 와서 후회니 뭐니 하는 말은 다 필요 없으리라. 지난 10년간 무뇌아였던 나도 좌파로 서서히 변했다. 경상도 좌파 남편의 인터넷 사이트 흔적을 따라 다니다 보니 이제 정치적으로 나도 모르게 어느 새 좌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젠 양같이 투표 행사를 하지 않는다. 세상도 변했다. 나도 변했다. 더 이상 양처럼 순한 국민은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늦었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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