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지음, 권영주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저 벽돌 같은 책을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사이덴스티커의 어린시절과 청년 시절을 다룬, 지루한 1,2 챕터를 지나 작가가 일본의 근대문학을 섭렵하기 시작하고 다니자키, 야스나리 그리고 유키오와의 일상적 그리고 문학적 교류가 활발하게 묘사되면서부터 재미가 솔솔 붙기 시작한다. 특히나  야스나리 같은 경우는 사이덴스티커의 번역 덕분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어서 야스나리와의 교류와 그 사이에서 소외된 유시마와의 관계 묘사는 그 무엇보다도 흥미진진했다. (사이덴스티커는 유키오의 경우, 다니자키나 야스나리의 작품과 달리 그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내가 이 작가에게 관심 있었던 것은 그의 생애가 아니고 그와 일본문학과의 관계였지 않나 싶다.) 

이 회고에 가까운 책을 읽다보면, 사이덴스티커는 50,60년대의 일본 순수 문학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워낙 번역문학을 중요시 여기는 탓에 사이덴스티커는 일본의 대가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친분을 두텁게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니자키나 야스나리같은 순수 문학의 대가들이 자신의 작품들의 영역본을 위해 아무 꺼리낌 없이 그를 만나고 자신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술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이 번역문학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음을, 그리고 역으로 번역문학의 우대 풍토가 노벨상 수상을 가져 온 것임을 미뤄 짐작해 본다.


일본 태생의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자기 나라의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미국 태생의 백인이  일본 작품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아무래도 태생적 언어가 아닌 2차적으로 획득한 언어를 가지고, 외국에 자기 나라의 문학작품을 번역소개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영어문화권의 사람들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감정과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2차적으로 언어를 획득한 사람보다는 태생적으로 그 언어를 획득한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를 내 나라 언어로 바꾸는 번역이라는 것은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한 단어 한 단어가 딱딱 맞아 떨어지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말이라는 게 어디 바디 랭귀지처럼 단순한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으랴.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을. 그럴 때는 번역가들도 말의 더하기와 빼기에 신경 쓰기 마련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사이덴스티커는 번역이 '뭔가를 내버려야 하는 가차 없는 작업"이라며 작품의 문장을 번역가가 임의적으로 삭제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데, 글쎄, 후기에 권영주씨가 이것에 대해 엄청난 반발의 글과 동시에  무엇인가를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감을 하면서 생각할 문제점이라고 지적하듯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성인 대상의  번역작품들은 번역가들이 최대한으로 원저자의 작품을 존중하며 번역하지만, 어린이 작품은 몇 몇 작품을 원작과 비교해 보면, 많은 부분 번역가가 아이들의 이해를 돕는 답시고 원문에 충실하기 보다는 원문에 비슷하게 번역가가 의역이라고 하기에는 눈살 찌푸려질 정도로 지어낸 문장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삭제는 말 할 것도 없고. 처음엔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화가 났었다.  

하지만 영어의 문장을 한국어로 옮길 때의 그 어색함이나 뻔뻔함을 고려할 때, 나름 최선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번역가를 비난 할 것만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오른다. 물론 아직도 나같은 사람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원하고 있지만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하거나 번역가가 읽는 이의 이해를 위해 다른 비유를 갖다 붙인다는(강주헌씨 같은 경우는 촘스키를 번역할 때) 경우를 읽으면서, 꽉 막힌 나의 원문 충실에 대한 고집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결국 삭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이덴스티커의 경우 지적 오만함이라고 치부하기 보다는 번역가 자신의  양심과 깊은 고뇌에서 우러나온 결과라면 어느정도의 유들함과 융통성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싶은 것이다. 번역이라는 게 단순히 외국어에 능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적지 않는 지식과 상식이 쌓아야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번역을 하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마이더스의 손을 가지고 있다. 번역문이 황금이 될지  돌이 될지는 그의 손에 달려 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무엇을 만지는 간에, 책을 받자마자 원문에 충실할 수 있는지, 빼야하는지, 스트레이트로 해야하는지,비유를 달리 해야하는지는 번역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번역한 책 한권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영향력이 문화적 contents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았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번역가들이 있어 다른 언어의 많은 글이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사이덴스티커가 없었다면, 일본의 순수 문학과 고전문학의 번역은 더딜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도 누군가는 했었지만, 본격적인 그의 일본 작품의 번역은 여러 쟝르의 일본문학 번역의 물꼬를 터준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현재 미국 아마존에 올라와 있는 일본 소설이 순수문학이든, 고전이든, 쟝르든지 간에 수 많은 작품이 미국태생의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고 있는 현실은 단지 부러움을 넘어 우리 나라 번역 문학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갖게 된다. 번역을 하찮게 여기는 우리 문학 풍토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우리 나라 번역가가 다른 나라의 작품을 번역하든, 외국인이 우리 나라의 작품을 번역하든지 간에 번역 문화의 우대와 융성이 한 나라의 문화를 풍성하게 해준다는 것은 틀림 없다.   

여하튼 그의 일본에 대한 열린 시각과 애정은 넘쳐 보인다. 단  이 책에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사이덴스티커가 순수 문학에만 관심이 있어 쟝르문학에 대한 언급이 단 한줄도 없다는 것이다. 란포, 세이지, 세이초 같은 거물급 쟝르소설가에 대한  무언급과 무관심은 한쪽에 치우져진 그의 문학관과 순수문학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이런 우리 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는 외국태생의 번역가가 한 명은 나와 주었음은 더 바랄 것도 없겠다. 

ps- 어째든 꾸역꾸역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를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번역한 권영주씨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들은 한가지 언어도 힘들어 유학이네 해외연수네 하는데, 일어와 영어의 번역책들을 번갈아 가며 출간하고 있으니, 그녀의 언어 실력이 부러울 뿐이다. 권영주의 프로파일은 책날개에 간략하게 나와 있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다행히 그녀가 쓴  번역 후기를 통해 현재 그녀가 일본의 쟝르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다. 남들은 언어 하나 갖고도 버벅대는 마당에, 두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왜 안 부러울소냐! 뭐 이런 생각! ㅋㅋㅋ 그럼 김석희씨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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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0-04-2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완독 하셨군요. 사이덴스티커의 오만함과 지루한 전개에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는데...

기억의집 2010-04-28 14: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사람 오만해요. 제가 방금 말한 윌슨과는 전적으로 글쓰기나 사고나 틀리더라구요. 이 사람은 백인우월주의도 상당한 사람인데, 이 양반의 가치는 일본문학을 서구에 소개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거 같아요. 일본에서는 무시 못 할 양반인 거 같던데...^^ 이 책 말도 사이덴스티커의 다른 책도 읽을까 하다가 말았어요. 근데 책은 충분히 매력적인 것 사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