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실은 꿈, 아니었을까.
눈으로 뒤덮인 땅에서 얼어붙는 추위 속을 며칠이나 달리다보면, 언젠가부터는 그다지 신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다보면, 이 눈이, 이 얼은 땅이 환상을 보여주는 것도 이상할 건 없잖아. 나는 사람들의 땅에서 너무 멀리 와 버린 것만 같은데. 가도가도 끝없이 하얀 땅 위에서 길을 잃었다는 것,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친구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낯선 자들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두려움 앞에선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었어. 조금씩 모여든 그들이 와. 나를 반가워하는 건지, 아니면 기다렸던 건지 나는 잘 모르겠어. 무서웠어.
나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어. 썰매를 끌고 달리던 나는 지금은 수의사로 살고 있어. 상냥한 스타와 명랑한 쿠키가 있고, 내 도움이 필요한 동물들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나는 친구를 잃어버린 얼어붙은 땅을 잊지 못했어. 그럭저럭 어렵지만 살 수는 있더라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이 세상에서도 거기까지였어. 잘 하려고 했는데도, 세상은 이해해주지 않았어. 진실은 어디쯤에 있긴 할 거야. 하지만, 믿어주지 않는다면 외면당하기도 해. 그래도 그 때는 몰랐어. 거기까지도 그래도 괜찮았다는 걸.
그건 어떻게 시작된걸까. 어느 집에서 환자를 발견했을 때, 아마도 그때쯤 알게 되었을거야. 알 수 없는 의문의 빨간 눈이 되어가는 사람과 동물들. 이 병에 걸리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치명적이고, 다음은 누가 될까 무서울 정도로 퍼져나가는데,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 있겠어. 이름도 모르고 어떤 것인지도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빨간 눈의 괴질이라 불리는 것. 여기에 누군가 섣불리 말했지. 인수공통전염병의 가능성을. 미지의 것이 주는 공포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데, 확인되지 않은 가능성이라는 걸 더하면 어떻게 될까. 이 도시는 곧 격리될 거야.
무서운 속도로 빨간 눈이 퍼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어. 안간힘을 써보지만, 역부족이라는 건 이런 것일거야. 명랑한 쿠키도, 친절한 할아버지도, 다정한 소녀도 다들 앞다투어 사라졌지. 그렇게 이 작은 동네에서 살아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사라지도록 강요받는 동안,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고 희생하고, 죽을 걸 알면서도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어. 그리고 나도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일은 알 수 없는 거지.
두려움이 두려움을 부르고, 미지의 불확실함에서 다시 두려움을 느끼는 시간. 이 병이 인수공통전염병이든 아니든, 더이상 달라질 것도 없어. 빨간 눈이 아니더라도 사람도 동물도 변해버린 눈이었거든. 이 일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명절을 앞두고 바쁘게 살았을 사람들도, 집에서 귀여움 받으면서 지냈을 동물들도, 더이상은 없는 걸까.
이번엔 구하고 싶었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어. 사람들은 가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이전의 선택을 바꾸는 꿈을 꿔. 그건 때로 절박하고, 때로 간절하지. 그 시절로 돌아가 잘못된 선택을 바꾸면 달라질 수 있을거라고. 돌아갈 수 없는 걸 아는데도 그렇게 원하는 건, 내 마음에 거기 남아있으니까.
그거, 실은 처음부터 꿈... 이었어.
꿈은 언제나 달리는 도중에 시작되거나, 위기에 빠진 순간부터 시작되는 걸. 그래서 때때로 영화의 도입부처럼 전후사정을 설명하지 않을 때도 있잖아. 그리고 완전히 일이 끝나거나 해결되어야 끝나는 것도 아니고. 눈을 뜨면 언제나 그렇듯 내 집의 어딘가에 있을 거야. 무서운 꿈이었어. 오늘은 조심해야겠네, 하면서 나는 바쁘게 일어나서 준비하기 시작할거야. 오늘은 설날이니까 차례도 지내야하고, 세배도 하고.
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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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1. 정유정의 <28>은 2013년에 나왔지만, 브라질월드컵이 본문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 2014년 초가 배경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처음 도입부의 아이디타로드 경주는 수년 전의 일이지만, 화양의 빨간눈 소동은 겨울에 시작되어 명절이 다 되어가는 시기까지가 주로 배경이 되는 시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에피소드로 그 소동이 지나간 이후의 모습도 있긴 하지요.
2. 얼마전부터 전국이 AI로 비상입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곳도 있습니다. . 설 연휴기간에 확산이 될까 문제된다는 뉴스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번 AI는 인체감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소설과 현실이 달라서 다행입니다. 명절과 연휴가 시작되었지만, AI 방역에 수고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현장에서 어려운 일 하고 계실 분들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느낍니다. 자식처럼 키웠던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동물들에게 쓸 약이 없어서 일어나는 일들이 안타깝습니다.
3. 저는 지난 여름에 이 책을 읽었고, 지금은 남은 기억에 의지해서 썼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서늘한 추위가 감도는 도시를 떠올렸지만, 지금은 8월 여름에 읽던 뜨거웠던 화양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지금쯤이 그 소동이 끝나가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 해서, 읽은 지 조금 되었지만 지금 씁니다.
4. 올해의 색이 다즐링블루라고 이름은 낯선데, 막상 보면 익숙한 색입니다. <28>의 표지에 있는 파란색도 비슷해요. 누군가는 페이스북의 색과 비슷해서 친근하다고 하지만, 저는 알라딘 포장비닐의 색이 떠오르던데요.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제가 색상을 많이 알고 있지 않으니까 그런 거겠죠.
5. 설날은 잘 보내셨나요. 차례도 지내고, 세배도 하고. 많이 없어졌지만, 전에는 섣달 그믐날에는 일찍 자지 않는 것도 있었다고 해요. 일찍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 저는 당해보지 않은 거지만,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데, 아이들 눈썹에 하얗게 칠해주더라구요. (그렇지만 오래되어 이런 풍습이 있는 건가 확실하게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6.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전에는 싫었지만, 지금은 약간 좋기도 합니다. 조금 바뀐 거겠죠. 그렇게 내년에도 나이를 한 살씩 먹겠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고 싶습니다. 올 한해 좋은 일들 많이 있으시길 바래요. 그리고 제 서재에도 자주 들러주시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