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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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앞의 생>은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1975년에 발표한 책으로, 그는 이 해 이 착품으로 생애 두번째 공쿠르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미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소설가였던 그가 61세가 되던 해에 발표한 소설은, 로자 아줌마와 모모라는 두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로자 아줌마는 젊었을 때는 성매매로, 나이가 들어서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모모는 본명이 마호메트로, 아주 어릴 때부터 로자 아줌마의 손에 자랐습니다. 정기적으로 우편환이 도착하는 아이이고, 부모와 친척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부모를 만나는 것을 부러워하며 온갖 말썽을 부리기도 했지만, 그 아이에게는 로자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로자 아줌마는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사람이고, 모모는 아랍인입니다. 이 동네는 유태인도 아랍인도 흑인도, 북아프리카에서 온 불법이민자도 서로 문제삼지 않습니다. 살림살이는 어렵지만 좋은 사람들이 참 많이 살고 있고, 좋은 직업은 아닐지 모르지만, 자기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있는 동네입니다.


 로자 아줌마의 많은 아이들 중에서 모모는 특별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입양도 가고, 부모를 따라 떠나지만, 모모만이 이 집에 남은 아이입니다.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관계이고, 실제로 혈연을 가진 사람보다도 더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은 로자 아줌마가 생명의 빛이 약해지는 시기를 맞으면서 조금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책의 뒷 부분에 실린 작가의 연표를 읽었습니다. 1914년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아버지 없이 엄마와 함께 여러 나라를 거쳐 프랑스에 온 아이, 이국적 외모에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아이. 그런 작가의 실제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는 어쩌면 작가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하던 그 시기에서 많은 것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이가 들 수록 더욱 선명해진다고 하고, 또한 그리워지는 법이니까요. 61세가 된 작가가 발표한 이 소설은 어린 소년을 통해서 전해지는 세상이지만, 이 소년은 지극히 어른스럽고, 그래서 소년같지 않을 때가 많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이 책을 쓰고 몇 년 뒤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사람이 로맹 가리라는 것이 공개됩니다.


 자기 앞의 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한 순간에는 반짝반짝 빛나지만, 어느 순간에는 빛을 다하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는 책임이 따르고, 누군가를 사랑해준 것에는 사랑으로 돌려주어야 할 것만 같아 때로는 멀어지고 싶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없이는 빛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 로자 아줌마는요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구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예요. 다행히 내가 같이 지내면서 돌봐주고 있어요.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으니까요.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내 친구 중에는 경찰서장도 있어요. 누구보다도 힘이 센 대단한 경찰이에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요. 왕이나 마찬가지죠. 함께 길을 걸어갈 때면 그 친군 내 아버지처럼 보이게 하려고 내 어깨에 팔을 얹고 다녀요. 내가 어렸을 때는 밤마다 암사자가 와서 내 얼굴을 핥아주곤 했어요. 그 때 난 아직 열 살이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상상을 했었죠. 그런데 학교에서는 내가 네 살 더 먹은 것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정신이 불안하다고 말했어요. 그건 유세프 카디르 씨가 날 데리러 와서 영수증을 보여주기 훨씬 전의 일이에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은 양탄자 장사로 유명한 하밀 할이버지예요. 그 분이 다 가르쳐주셨어요. 지금은 장님이 되었지만요.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의 책을 들고 다녀요. 나도 크면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쓸 때면 늘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잖아요. 로자 아줌마는 내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서 자기 목을 자르려고 덤비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어요. 내가 유전성 정신병자가 아닐가 겁을 냈던 거죠. 하지만 자기 아버지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창녀의 아이는 없거든요. 그리고 나는 절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라구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크면 안전을 위한 것들을 모두 갖춰놓고 내 마음대로 살 거예요. 그러면 겁낼 일도 없겠죠. 아줌마네 녹음실에서처럼 모든 것을 뒤로 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까워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로자 아줌마도 젊고 아름답게 되어 보기 좋을 텐데요. 어릿광대 친구들이 있는 서커스단을 따라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말했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모두에게 엿먹으라는 말도 못했어요. 돌봐줘야 할 유태인 노인네가 있으니까요......"

- 페이지 248-249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겅니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냐가 그리울 것이다. 하지만 이 집 아이들이 조르니 당분간은 함께 있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의사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 페이지 311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1975(61세) 에밀 아자르 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발표, ‘자기 앞의 생‘으로 1975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아자르라는 가명은 작가 자신의 ‘화신‘으로, 이 같은 모험은 세계 문학사에 유레가 없는 일이었다. 이미 공쿠르 상을 한 번 수상한데다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프랑스 총영사까지 지낸, 더 이룰 것이 없는 화려한 이력의 작가의 작품에 평론가들이 더는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팬에 가면을 씌우기로 결심한 듯 하다. 한번 수상한 작가에게는 수여하지 않는 공쿠르 상을 두번째로 받게 되자, 오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를 내세워 수상을 거절하는 편지를 쓰게 한다. 그러나 공쿠르 아카데미 의장인 에르베 바쟁은 "아카데미는 한 후보가 아니라 한 권의 책에 투표한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 그렇듯, 공쿠르 상은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수상자는 여전히 아자르이다."라고 답변했다. 이해, 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발표.

- 페이지 346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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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1-24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인생 책 중에 하나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서니데이 2017-01-24 12:36   좋아요 1 | URL
이 책 좋아하시는 분이 많을거예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님 오늘도 추운 날이지만 좋은하루보내세요.^^

해피북 2017-01-24 2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게 이 책은 책장에서 늘 손짓하는 책이자, 서재 이웃님들의 찬사를 들어서 마치 읽은 것같은 친숙함을 느끼는 책이기도 한데요 ㅎ서니데이님의 글을 읽으니 빨리 로자 아줌마와 모모를 만나고 싶어집니다^~^

서니데이 2017-01-24 21:22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오랜만에 다시 읽었어요. 그러니 모르는 이야기는 아닌데도 그 때와는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가지고 계신 책이라면 나중에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거예요.
해피북님 좋은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