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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평점 :
이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어느 날 밤에 차를 타고 가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차를 태워달라는 수상한 젊은 여인의 이야기,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부탁을 거절하면 안 될 것만 같아, 얼떨결에 뒷 자리에 태우고 비오는 밤의 도로를 달리는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은데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보고 싶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충동을 안고 달리다보면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던,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이 책 <라요하네의 우산>는 소설집입니다. 열 개의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사람들도 앞서 말한 이야기처럼, 그냥 갑자기 시작합니다. 이야기 자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의 페이지를 차지하지만 그 안에 조금씩 이상한 부분이 하나 둘 뒤섞이면서 이야기는 다른 색과 느낌으로 변합니다. 아니,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이 단 하나만 들어가도, 그것 전체가 모두 달라지게 됩니다. 마치 밤의 고속도로에 나타난 젊은 여인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그 여인도 그냥 차가 고장나서 태워달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되면 재미있는 이야기는 될 수 없는 것처럼, 이 이야기 역시 약간의 이상한 것들로 인해 이야기가 조금 더 이질적이거나 독특한 빛으로 변하면서 조금 더 등장하는 인물들의 욕망을 잘 보여줍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진한 것처럼, 겉으로는 상식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지만, 속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은 모습들이 여과되지 않은 채 들려옵니다. 그러면서도 말하는 사람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느껴지고, 속으로 퍼붓는 말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의 절망도 함께 나타납니다.
열 개의 이야기는 서로 다릅니다. 등장인물도, 장소도, 내용도 모두 다 다릅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이 이야기들은 같은 주제가 변주되는 음악처럼, 이야기 자체는 달라지지만, 그 안을 지나는 느낌이 비슷합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어떤 이야기들이 있고, 그것을 어떤 사람이 구연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주는 일정한 느낌, 그 사람의 표현과 전달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는 그 장면에 대한 느낌을 그렇게 설명하면 얼마나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누구에게 들었는지, 또 누가 말하는지에 따라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질 때가 있는 것처럼, 이 이야기 역시 작가를 통해서 흘러 나오면서 생겨난 유사성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다시 처음 꺼낸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런 이야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조금 이상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와 같은 육하원칙을 이루는 기본적인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비오는 날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우는 젊은 여자가 실제로 있겠나, 같은 상식적인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들을 문제삼지는 않습니다. 그건 그냥 이야기이니까요. 으악, 비명을 지르는 끝을 지나면, 우리는 다시 평범한 한 공간 안에 있는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검고 긴 머리의 젊은 여인은 나타나지 않고, 비오는 밤의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차 안도 아닌, 일상의 소음이 들리는 형광등 조명 아래로 무사히 그리고 안전하게, 귀가합니다.
그런 것처럼, 이 이야기 역시, 평범한 사람들을 등장시키면서도 특이한 점을 넣은 덕에, 이것이 옆집과 우리집, 친구와 내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집의 먼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영화관의 스크린 속 일이라면 아무리 무서운 남자가 나온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은 안전합니다. 그런 것처럼, 이야기 속의 특이함은 우리를 멀리 데리고 갔다가, 다시 안전하게 되돌려 놓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라요하네로 떠나도 될 것 같습니다.
소설이 무엇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확실한 건 좋은 소설을 만나면 내가 쓰는 게 소설이 되려면 멀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인다는 것. 좋은 소설이란 이야기 안에 서늘한 진실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나쁜 소설이란? 이야기 안에 작가의 자기합리화가 들어간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인칭 시점 소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삼인칭 소설을 표방하지만 작가의 자의식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무늬만 삼인칭인 소설 역시 그다지 믿지 않는다. 그렇다. 그것들은 자기연민이며 자기방어의 소산물이다.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요즘 세상에 내레이션을 맡은 화자의 진술이 얼마나 진부하며 자기기만을 일삼는지를 자주 보아왔다. 중립을 가장한 채 자기연민에는 당위성을 끌어다 붙이고, 타자를 향한 시선에는 근거 없이 객관적인 척 하는 기만. - ‘누가 빈지를 잠갔나‘ p.186~187, 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문학의 문학
음지나 습지의 기억일수록 잘 살아나고 확산된다. 처음엔 한 두 잎으로 시작했겠지. 하지만 돌봐야 할 저마다의 기억을 윤색하고 다듬는 과정에서 저토록 많은 꽃잎으로 늘어났겠지. 꽃말조차 매혹과 비난이라나. 인간사에서도 매혹과 비난은 이음동의어가 아니던가. 매혹과 비난의 꽃말이 왜 같은 자리에 있는지는 세파를 겪다보면 절로 알게 된다. 수 겹의 잎으로 피어나는 꽃잎은 한 장 한 장 각기 다른 기억의 조각보를 지닌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조각보를 만드는 사람의 기억처럼 얇디얇은 꽃잎도 각자마다 다른 기억을 품는다. 라넌큘러스 꽃잎이 벌어진다. 잎 얇고 빛깔 많은, 수 백 개의 잎으로 번지는 저 기억의 낱 잎들. 그 잎들은 각자가 만든 틀 안에서 재편집되고 수정되고 확산된다. 그렇게 기억의 꽃잎은 피고 진다. - ‘누가 빈지를 잠갔나‘ p. 213, 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문학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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