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와서 그녀는 들었다. 노르웨이 최북단에 사람들이 사는 섬이 있는데, 여름에는 하루 스물네 시간 해가 떠 있으며 겨울에는 스물네 시간이 모두 밤이라고. 그런 극단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 혹은 검은 낮일까?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인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백야, 페이지 96
밤사이 내린 눈에 덮인 갈대숲으로 그녀가 들어선다. 하나하나의 희고 야윈, 눈의 무게를 견디며 비스듬히 휘어진 갈대들을 일별한다. 갈대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늪에 야생오리 한 쌍이 살고 있다. 얼음의 표면과 아직 얼지 않은 회청색 수면이 만나는 늪 가운데서 나란히 목을 수그려 물을 마시고 있다.
그것들에게서 돌아서기 전에 그녀는 묻는다.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늪가를 벗어난다. -갈대숲, 페이지 106-107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엇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 흰나비, 페이지 108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온 알약들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당의정, 페이지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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