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회·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들로 나가보니 논에는 벌써 누런빛이 짙다. 날씨도 선선하여 가을이 완연하다. 그 무덥던 여름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홀연 가버렸다.
휙 지나가버리는 무상한 것은 돛을 단 배와 사람의 나이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한 세이쇼나곤(淸少納言)의 말이 그럴 법하다.
날이 선선해지면서 계절 분위기에 어울리는 정취(情趣)있는 책을 골라 읽고 싶다.
“가을이란 하늘의 별다른 가락이라”고 말한 장조(張潮)는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기에는 가을이 마땅하니 그 운치가 남다른 까닭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삶(幽夢影)’, 정민 옮김, 태학사> 책이 계절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마는, 별다른 가을에 남다른 맛을 주는 책을 접하는 것도 운치있는 일의 하나이리라.
행복하게도 올가을에는 그런 책을 만났다. 십여일 전 출간된 ‘마쿠라노소시(枕草子)’(정순분 옮김, 갑인공방)가 바로 그 책이다.
저자 자신이 “할 일 없는 시골 생활 중에, 눈에 보이고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설마 남이 보겠나 하고 써서 모은 것”이라고 고백한 수필집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0년 전에 지어진 일본 고전 수필의 효시로서, 세이쇼나곤이란 고위직 상궁(尙宮)이 지은이이다. 한 여성이 관찰한 인생 이야기 300가지를 잔잔하고 담백하며 독특한 문체로 써나갔다.
1000년 전 일본 여자의 삶과는 아무런 교섭도 없는 내게 이 수필집이 곰살맞게 다가오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담백하고도 예민한 감각, 여성적 시선과 언어가 발산하는 멋이 매력적이고, 인생에 대한 통찰이 생동하여 이틀 만에 다 읽기는 했으나 너무 빨리 읽은 것 같아 종내 아쉽다.
그녀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 같다. 그윽한 멋이 풍기는 인생사를 몇 가지 드는데 “방 한쪽 구석이나 장지문 뒤에서 들을 때, 식사 중인지 젓가락 소리와 숟가락 소리가 섞여서 들리는 것.
그런 때 주전자 손잡이가 탁하고 옆으로 넘어가는 소리 또한 마음이 끌린다”라고 쓰기도 했다.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주전자 손잡이가 넘어지는 소리에 마음이 끌리고 그런 데 시선을 두어 글로 쓰는 것이 1000년 전 사람의 감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그 예민한 감각이 신선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포착은 그녀의 장기다. “두세 살짜리 아기가 막 기어오다가 작은 티끌 하나를 발견하고 그 조그만 손으로 집어서 어른한테 보여줄 때는 정말이지 귀엽다”고 앙증맞고 귀여운 것을 포착해냈다.
인생살이 순간순간에 맞닥뜨리는 우연하고 찰나적인 행위에서 행복과 멋을 발견하여 담담하게 자분자분 말하듯이 전해준다. 생활에서 발견하는 유현(幽玄)한 삶의 미학이 그의 수필에는 번득인다.
“남몰래 만나는 애인 목소리를 항상 만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었을 때나 누군가 그 사람 얘기를 화제로 올렸을 때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원래 가슴은 조마조마하게 마련인가 보다. 어젯밤에 왔다 간 남자가 아침에 편지를 늦게 보낼 때도, 그게 설령 남의 일일지라도 조마조마하다”라고 남자를 기다리며 가슴 졸이는 사연을 묘사할 때도, “급한 병자가 생겨 수도승을 부르려는데 마침 자리에 없어 하인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겨우 불러와 한숨 돌리고 기도를 올리게 했더니, 요새 장사가 잘 돼서 자주 불려다녔는지 앉자마자 다라니경 읽는 소리가 반쯤 조는 소리인 것도 정말 밉살스럽다”라고 분위기 썰렁하게 만드는 일을 들 때도 인생에 대한 그녀의 시선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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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대회·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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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인간 심리와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가 보인다.
‘마쿠라노소시’는 그동안 읽어왔던 한국이나 중국, 나아가 서구의 수필과는 멋과 맛이 다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별다른 맛이지만 깊이 음미할 만하다.
운치가 남다른 계절에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정취의 수필집을 읽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