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소설의 위기] 예전만 못하지만 '소설의 시대'는 계속 된다
1970~1980년대 사회 모순 고발·대하 역사물 '선풍적 인기'
2000년대 더욱 젊어지고 다채로워져 … 개인 이야기가 주류

‘머나먼 쏭바강’은 1970년대의 대미를 장식한 베스트셀러였다. 1978년 계간 ‘세계의 문학’이 주관하는 제2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영한의 이 장편은 한국군도 참전하여 남의 전쟁 같지 않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휴머니즘 소설이다.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던 박영한은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전쟁의 고통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간행한 출판사(민음사)에 갈 때마다 인세라면서 돈을 주더라는 것이다. 그는 화수분처럼 그런 일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경제적으로 산업화 시대였던 1970년대는 소설적으로도 산업화 시대에 값했다. 1960년대까지는 수천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는데, 1970년대에는 5만부 이상으로 그 기준이 올라갔다. 그때의 베스트셀러가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1973), ‘도시의 사냥꾼’(1977),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1974), 조해일의 ‘겨울 여자’(1977) 등 이른바 호스티스 소설에 국한된 현상이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황석영의 ‘객지’(1974),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1976),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 한수산의 ‘부초’(1977),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1977), 이병주의 ‘낙엽’(1978),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1979)와 같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산업사회의 문제적 국면을 예리한 산문정신으로 파고들었던 다수의 뛰어난 작품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 '한국 문학의 산실'이라 불리는 출판사 '문학동네'가 펴낸 소설 작품들

이 목록에는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1973), 이청준의 ‘소문의 벽’(1973), 최인훈의 ‘광장’(개정판·1973), 이제하의 ‘초식’(1974),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 이병주의 ‘지리산’(1978), 홍성원의 ‘광대의 꿈’(1978),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1979), 김성동의 ‘만다라’(1979) 등등 우리 소설사를 빛낸 다수의 작품도 추가될 수 있다.

정치적 억압과 자유, 경제적 질곡과 평등, 분단 상황과 초극, 거친 실존적 조건과 불안, 여성성 등 당대의 중심 가치들을 산문정신이 가로지르며, 시대를 고뇌하고 인간다운 삶을 고민하는 독자들과 더불어 의미 있는 소통을 하면서 당당하게 ‘소설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 1970년대의 풍경이었다.

‘시(詩)의 시대’로 출발한 1980년대에도 ‘소설의 시대’는 그치지 않았다. 역사와 현실과 문화에 대한 폭넓고 깊은 성찰의 이야기들이 줄곧 그 시대의 이야깃거리로 관심을 끌었고 문화적으로 의미있는 화두가 되었다. 1970년대 말에 나온 ‘지리산’ ‘만다라’ ‘사람의 아들’이 줄곧 베스트셀러를 이어갔고 ‘젊은 날의 초상’(1982), ‘영웅시대’(1985),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등 일련의 이문열 소설들이 독자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에는 어두운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1981),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1981), 김홍신의 ‘인간시장’(1981), 김신의 ‘대학별곡’(1983) 등이 관심을 끌었다.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에 대한 독자의 폭넓은 지지 또한 1980년대의 풍경이었다. ‘남과 북’(홍성원), ‘불의 제전’(김원일), ‘겨울 골짜기’(김원일), ‘태백산맥’(조정래), ‘영웅시대’(이문열) 등 분단소설과 ‘토지’(박경리), ‘장길산’(황석영), ‘객주’(김주영), ‘타오르는 강’(문순태) 등의 대하 역사소설이 1980년대의 밤을 밝힌 목록들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 사회에서 여성성의 문제를 매우 섬세한 문체와 특징적 어조로 다룬 ‘유년의 뜰’(1981)과 ‘바람의 넋’(1986) 등 오정희 소설을 비롯하여 양귀자, 최윤, 신경숙 등 여성 작가들의 소설이 새로운 서사 지형을 예고했다. 신(新)중산층의 속물 근성을 집요하게 파헤친 ‘짐승의 시간’(1986)을 비롯한 김원우의 소설들과 분단 상황과 현실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1984)이나 이창동의 ‘소지’(1987)도 문제작이었다. ‘마음의 우주’의 풍경을 자유자재로 보여준 박상륭의 실험소설 ‘죽음의 한 연구’(1986), 현실에 대한 타자의 형식으로 실험적인 서사 궤적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구축한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1983)를 비롯하여 최수철의 ‘공중누각’(1985), ‘화두, 기록, 화석’(1987) 등도 1980년대 소설사를 빛낸 실험소설이었다.

전체적으로 1980년대는 10년 내내 지속된 ‘이문열 현상’ 이외에도 매우 다양한 방식의 소설이 독자와 소통하면서 한국 문학의 자산을 튼실하게 다졌던 시대였다. 역사와 분단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새로운 방식으로 폭넓게 모색했고, 노동 해방과 민족 해방에 대한 서사적 염원도 어지간했으며, 중산층이나 여성성에 대한 탐문과 소설의 실험성에 대한 도전도 소설의 시대를 지속시킨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후기 산업사회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변화 등 세계사적 지각변동 등과 더불어 1990년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예고하는 듯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을 목도하면서 이제 소설에서 ‘영웅시대’는 가고 ‘군웅할거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도 1990년대 초반에 있었다.

과연 그랬다. 문학적으로 일부 주요 작가들에 의해 시대정신과 문학정신이 추동되던 시대는 가고 다수의 작가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른 문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의 풍경이었다. 특히 박완서, 오정희, 양귀자, 최윤, 김형경, 신경숙, 공지영, 은희경 등 많은 여성 작가의 작품이 각광을 받아 본격적인 여성소설의 시대를 연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공지영), ‘깊은 슬픔’(신경숙), ‘새의 선물’(은희경) 등이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 이청준의 ‘서편제’, 조정래의 ‘아리랑’, 안정효의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도 1990년대 독자들의 애호를 받았다. 그런가 하면 문단의 논의와는 별개로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베니스의 개성상인’(오세영), ‘아버지’(김정현) 등은 대형 밀리언셀러로 사회학적 사건이 되기도 했다.

요란한 밀레니엄 시기를 거쳐 2000년대가 되었다. 한국 소설은 더욱 젊어졌고 다채로워졌다. 시대정신과 더불어 호흡하던 1970~1980년대와는 달리 개인의 작은 이야기들이 많아졌다. 그야말로 ‘소설’이 되었다.

후기 산업시대, 정보화 시대의 환경과 매체 변화 및 문화 상황의 변화 등 여러 요인이 작은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시대를 부추겼다. 레퍼토리는 다양해졌지만 작은 이야기들은 넓고 깊은 공감대를 확보하기 어렵게 되었다. 독자들의 선호나 독서 태도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2004년에 젊은 작가 김영하는 문단이 인정하는 유력 문학상 세 개를 한꺼번에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그는 1970년대 말 박영한 같은 다른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상을 많이 받고 비평적인 조망을 많이 받아도 그는 ‘2만부 작가’였다. 그러니 출판사에 갈 때마다 인세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영하가 “예전에는 소설의 시대가 있었다네”라며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는 즐겁게 소설을 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설의 시대는 계속될 것이다.


우찬제 문학비평가·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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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6-08-31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외국소설보다 한국소설이 많이 팔려서 우리나라 작가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음 좋겠어요.. ^^ 한국소설 좋아요..~

stella.K 2006-09-0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외국소설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작가들 잘 쓰는 사람은 아주 잘 쓰더라구요. 우리나라 소설도 많이 읽어주긴 해야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