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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상위의 천사 - [초특가판]
제인 캠피온 감독, 케리 폭스 외 출연 / 기타 (DVD) / 2003년 9월
평점 :
그러고 보니 오래 전 <피아노>를 끝까지 다 보지 못한 기억이 난다. 영화든 드라마든 책이든 첫 인연을 잘 맺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그 다음도 기약할 수 있는 법인데 또 그런 의미에서 제인 캠피온은 나와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무슨 바람이 낫을까? 이 오래된 영화를 지금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주인공의 머리가 인상적이라는 걸 대뜸 떠올릴 것이다. 어마무시한 곱슬머리! 지금이야 일부러 그런 가발을 만들어 쓸 정도지만 주인공이 나고 자랐을 193, 40년대는 한마디로 구제불능의 머리였을 것이다. 더구나 머리색도 빨간색. 옛날 같으면 마녀라고 했을 것이다. 주인공만해도 3명이 등장한다. 유년과 소녀, 숙녀로 나눠 각각의 시절을 연기한다.
주인공의 소녀 시절 어디쯤에 왠지 나의 모습도 중첩되는 느낌이다. 주인공처럼 빨갛지는않지만 구제불능의 곱습 머리는 하나다. 나이들면 머리숱이 줄어든다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구제 받지 못한 머리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서 왠지 주인공의 머리 얘기가 나오면 남의 얘기하는 것 같지가 않다. 아는 사람들이야 관심있어 한마디씩 하고 만져주고 한다지만 그것도 왠지 내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아 편치가 않다. 그 시절 누구라도 네 머리는 개성있다고 해 줬으면 용기를 갖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내 머리가 누구를 불행하게 만든 것도 아닌데 괜히 주눅들어 있었다. 그러다 가수 인순이가 데뷔 초부터 파격적인 머리를 하고 나왔을 때 내가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그녀의 머리보단 내 머리가 좀 낫긴 하지. 누구는 도진개진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해 맑은 것은 아니지만 악한 곳이라곤 전혀 없는 주인공의 다소 어눌한 연기가 능청스러우리만큼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뉴질랜드의 국민작가 자넷 프라임의 자전 소설을 제인 캠피온이 영화화한 것이다. 그녀가 자국내에선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는 우리로선 가늠할 수가 없다. 그 나라가 우리를 볼 때 제 3 세계라고 하겠지만, 우리 역시 뉴질랜드가 미국이나 일본만큼 익숙한 나라라고는 볼 수 없을 테니.
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정신분열증 즉 조현병에 대한 지식이 저 시대에 그렇게도 없었나 놀랍기도 하다. 물론 난 아직 조현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영화의 주인공 자넷 프라임은 다소 정서가 예민하고 대인 기피증이 있어서 그렇지 조현병자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의사의 오진으로 한 때 조현병자로도 살고 병원신세도 졌다.
사실 어찌보면 그녀의 불안한 정서를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영화엔 잘 표현이 안 되있는 것 같기도 한데 오빠가 간질병이고, 두 언니가 각각의 시차를 두고 익사한 것도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인을 기피하고 책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넷은 그녀만의 문학의 심연을 퍼올렸을 것이다.
문학. 그것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풍요와 만족속에선 결코 존재할 수 없고, 인간의 온갖 억압과 부조리함 속에서 피어나는 꽃 같은 것은 아닐까? 그것을 꺾어 갖는 순간 신기루는 사라지고 그것의 시녀가 되서 그 실을 잣는 사람이 작가가 되는 것이겠지.
작가는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 글로 쓰길 원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한다. 그것은 거의 본성에 가깝다. 아니 작가에게 글을 쓰는 것이 본성이라고 한다면 자서전을 쓰는 것 역시 본성이다. 그래서 자넷 프라임은 <내 책상 위의 천사>란 자전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만이 그러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상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게 뭔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자기 얘기 한 번은 하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책 10권은 나온다고 떠든다. 그러나 정작 단 한 페이지 아니 단 한 줄도 못 쓰는 게 대부분이다.
자넷 프라임의 시대에 자서전은 아무나 쓰는 장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회고록을 포함)자서전을 쓰는 행위가 흔해졌다. 이걸 두고 우려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서전이 누구를 헷고지 할 목적이나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고백의 차원에서 또는 지금까지의 인생을 정리하는 차원에서라도 꼭 한 번은 어떤 식으로든 써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작업을 위해서라도. 물론 쉽진 않겠지만 꼭 그것을 써서 돈을 벌거나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는 욕심을 버린다면. 누구의 인생도 이유없는 인생은 없고 이해 받지 못할 인생은 없다. 그것을 가장 잘 정리할 수 있는 건 글로 남기는 것 밖에 없다.
문학에서 고백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글쓰기에서의 황금율은 정직함, 솔직함이라고 하지 않던가? 자넷 프라임의 자전 소설이 출판되었을 때 자국내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감추고 싶은 개인의 내면을 얄짜 없이 보여주지 않는가. 사실 그게 생각 보다 쉽지가 않다. 그래서 자기 인생 이야기 책으로 쓰면 10권은 되는데 단 한 권, 한 줄도 못 쓰는 건 무엇보다 글을 못 써서가 아니라 여기서 걸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돌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글을 쓸 수가 있을까?
영화 장면에서 보면 누가 자넷에게 그런 말을 한다. 작가로 성공할 생각하지 말라고. 그건 그저 취미로 하고 살 길 찾으라고. 그런 말은 지금도 작가들 사이에선 심심찮게 하는 말이다. 그만큼 작가는 하나의 온전한 직업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자넷은 귓등으로 듣고 열심히 글을 써서 어느 출판사와 계약을 맺으면서 아파트를 하사 받는다. 뭐 영원한 건 아닐지 모르지만 작가로서 작업실로 쓰일 아파트를 하사 받는다는 건 대단한 것이다. 협회 같은 곳에서 유럽 곳곳을 여행해 볼 수 있는 자격도 얻는다. 그만하면 작가로서 최고의 대우 아닌가. 작가가 직업이 되고 안 되고는 역시 작가에게 달려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자넷 프라임의 자전 소설은 현재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영화 본 것을 기념해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하필 출판사가 문제가 있는 출판사다. 불매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거기서 나오는 책을 사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 갈등하거나 편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현실이 좀 그렇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