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 메릴 스트립 외 출연 / 에프엔씨애드컬쳐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는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인가에 대해 묻고 있는 것 같다. 우린 흔히 아름다운 것 또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만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정답일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로도 미(美)의 기준을 나눌 때 '추미(醜美)' 즉 추한 것도 미의 기준에 포함시킨다. 그런 것처럼 음치도 성악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인가를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당연히 음치는 성악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영화의 얼개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도 같다. 그 동화가 말하는 건 정직 또는 진실함을 가르치기 위함인데 오늘 날엔 과연 진실만이 최선이냐 또는 그것만이 이 세상을 구원하는가에 오히려 과거의 가치관에서 다소 비껴선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보는 건 돈과 예술과의 상관관계다. 예술은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술해서 밥 먹을 생각하지 말고, 배를 곯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다소 잔다르크적 사고를 가진 예술가나 예술 애호가가 여전히 존재하는 듯하다. 물론 난 그들이 여전히 전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야 예술도 정화될 수 있는 것이 니까. 그러나 예술은 자본의 자양분을 먹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영화의 주인공 플로렌스 젠킨스는 실존 인물이다. 사상 최악의 성악가란 오명이 있긴 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실제로 이 영화의 장르는 드라마 코미디물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뭔가 모르게 나의 의식을 자극하는 게 있어 갈수록 좀 진지해 졌다.

플로렌스가 비록 최악이란 오명이 있긴 하지만 성악가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럴 수 있었던 것엔 그녀가 음악을 너무 너무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부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자본가의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 재산을 하나도 상속 받지 못하고 자수성가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걸 보면 가난이 꼭 사람의 주제를 파악하도록 만드는 건 아닌 것 같다. 주제파악 보다 앞선 건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녀는 난봉꾼인 첫 남편에게서 매독에 감염되어 평생 고생을 하고 의학적으론 50대 안에 사망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그 나이를 훨씬 넘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주제 파악은 당치 않는 일이다. 

돈이 좋긴 하다. 비록 돈이 플로렌스를 진정한 성악가로 만들어주진 못하지만 매번 박수 부대는 만들 수 있으니. 물론 진지한 음악가가 있었다면 플로렌스를 보고 신성한 음악을 모독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아무도 그러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음악 발전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유명하다던 토스카니니가 그녀의 성악을 지도한다. 그가 무엇이 아쉬워 성악지도를 했겠는가. 그 역시 그녀의 그늘 아래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난 이쯤 보고 있을 때 잊고 있던 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오랜 질문과 맞닥트리고 말았다. 이것은 나의 책 <네 멋대로 읽어라>에서 나의 뮤지컬 작품 제작 과정에 언급했던 부분이기도 한데, 몇 년 전 <뮤지컬 손양원>을 대학로 무대에 올리면서 오랜 숙원을 이루어 좋긴 했지만 그때 겪은 자본의 힘이란 건 나에게 거의 충격으로 다가 왔었다. 

그때 난 애써 쓴 대본이 제작자의 손에 의해 거의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했는데도 그걸 속수무책으로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은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자본가의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았다. 거기까지는 뭐 자본주의 세상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내 안에 남아 있던 한 가지 질문 그렇다면 하나님은...? 기독교적 양심이란 건 그 앞에서 소용이 없는 것인가? 각본은 분명 내 이름으로 나가긴 했지만 그건 이미 내 작품이 아니었다. 제작자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이름만 내 이름으로 나가면 뭐하나. 정말 괴로웠다. 그리고 난 복수라도 하듯 제작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일관했었다. 뮤지컬의 뮤 자도 모르는 인간이 돈 많다고 자랑이나 하고 암사자마냥 작품을 갉아먹는다고. 

대체로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 침묵하시는 경우가 많으시니 나는 그렇게 표독스럽게 변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 공연이 망치길 바랐다. 그 제작자를 생각하면 그랬다. 어찌나 교만하고 무례한지 작품이 성공하면 자기가 잘 나서 성공한 줄 알지 않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라 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 반대였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이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화를 내야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후자를 선택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공연의 한 부분을 맡은 사람일뿐 전체를 보고 비평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공연의 시작은 작가에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마지막은 관객에게 있다는 것. 관객이 좋다고 하면 다 좋은 것이다.

이 영화도 보라. 시작은 플로렌스에게 있는 것 같지만 진짜 플로렌스를 있게 만든 것은 그녀를 토끼라고 부르는 남편도, 반주자 맥문도, 토스카니니도 아니다. 그녀의 존재를 완성시킨 건 관객이다. 관객 대부분은 그녀의 노래를 조롱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 조롱했던 것도 아니다. 누구는 진지했고, 누구는 경청했다. 진심은 통한다고 비록 음치여도 자신이 정말로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어찌보면 주제 파악이나 하라는 말처럼 주제 넘은 말도 없다. 뉘라서 함부로 이 말을 하랴. 주제를 파악하고 안하고는 그 사람의 몫이지 나의 몫은 아니다. 그런데 우린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에 밤 놔라, 대추 놔라를 참 잘한다. 왜 사람은 그 사람이 꿈 꾸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일까. 때로 꿈속에 있는 것도 건강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늘 제 정신으로만 살면 사람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살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도 보라. 플로렌스가 꿈을 깨고 현실을 마주했을 때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그녀가 훌륭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성악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제작자가 뭘하며 지내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새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공백이 생각 보다 길다 싶다. 더 이상 제작을 안 하기로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현실과 한계를 깨달아서는 아닌지 모르겠다. 또 그 현실과 한계를 깨닫게 하는데 지난 날 나도 공헌을 했던 탓은 아닐까 모르겠다.

비록 그 제작자는 내 작품을 더 이상 제작하지 않더라도 어디선가 계속 제작은 해 주길 바랄 뿐이다. 그 작업은 솔직히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야 우리나라 공연 발전에 조금이나마 공헌하는 것이니까. 나는 지금쯤 되서야 정말 모든 것 다 잊고 그가 잘되길 축복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서도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안타깝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7-03-04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인가에 대해 묻고 있는 것 같다.˝
- 저는 추한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예술이라고 봅니다. 현실 반영을 제대로 했다면요.

자본의 논리가 우리를 슬프게 할 때가 많지요. 공감합니다.


stella.K 2017-03-04 13:4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나름 용기를 주던데요?
생각할 거리도 줘서 이 영화 전 괜찮게 봤어요.
앞으로 노래 못 부른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진심을 다해 부르면 알아주겠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