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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평점 :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 저자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다. 미국에는 영화철학 관련 세미나가 있는가 보다. 저자는 이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영화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영화철학이라...! 뭐 없으라는 법 없겠지. 법에도 철학이 있고, 과학에도 철학이 있으며, 미술 작품에도 철학이 있는데 영화라고 철학이 없을라고.
언젠가 후배와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야, 대학에 철학 강의를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 패쇄하는 대학이 점점 늘어 난다더라. 이래가지고서야 철학이란 학문이 재대로 버텨내기야 하겠니?" 그러자 그 후배는, "철학이 철학 자체로 살아남을 수 없다면 다른 분야와 합쳐져서 계속 발전해 갈거야." 그러면서 철학의 위기론에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그 후배의 말을 들으면서, 그렇겠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웬지 서글퍼 지기도 한다. 철학이란 그 어려움 때문에 나는 선듯 좋아할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인문학의 꽃이요 한때는 강의실이 꽉찰 정도로 그 명성을 구가 했는데, 지금은 여러 실용학문에 밀려 그 명맥만을 유지한다고 하니 안타까울 노릇이다.
그래도 80년대 초 들어서면서 소위 철학에세이류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면서 철학이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가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에 대한 수해를 입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철학에세이류는 다소는 애매모호 했다. 철학책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볍고, 에세이라고 하긴엔 또 좀 어색하다. 그냥 철학 개론서를 쉽게 풀어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철학 개론서류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밖에.
그후 내가 이런 류의 책을 즐겨읽은 건 아니지만, 그동안 철학을 쉽게 풀이한 책들은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서 선택의 폭도 다양해지고 개중엔 꽤 괜찮은 책도 나온 것 같다.
이 책 역시도 영화라고 하는 매개를 통해 철학은 이런 거라고 소개하고 있다. 얼핏보면 철학책이 하도 인기가 없으니까 요즘 영화 안 보는 사람 거의 없겠다, 접목시켜 또 하나의 칵테일을 시도한 듯도 싶다. 하지만 저자의 세련된 문체와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저자는 어떻게 영화를 통해 철학을 깊이있게 설명해 놓을 수 있었을까?
읽다보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면서 니체의 이론을 녹여내고, 헤겔의 변증법을 이렇게 끼워 맞추고, 최신 철학 개념을 이렇게 섞어 넣고...기타 등등. 뭐 이러면서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영화 제작자나 감독은 철학 지식이 해박해 그렇게 종횡으로 끼워 맞출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런 스토리를 이렇게 비주얼 하게 보여주면 될 것인가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떠한 스펙트럼을 들이대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져 보인다. 저자 이왕주 씨는 철학자답게 아주 노련하고도 세련된 문체로 자신이 본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철학을 잘도 설명해 내고 있었다. 덕분에 자꾸만 좁아지려고 하는 나의 시야와 사고가 조금은 넓어진 듯도 하다.
뭐 다 아는 얘기겠지만, 철학은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사고체계를 구체화시켜 준다. 예전 고대철학은 이것이 진리가 아니겠는가라고 제시해 준다면, 현대로 진입할수록 진리를 말하기 보다는 현상을 직시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의미가 더 강해 보인다.
특히 저자는 <슈렉>이라고 하는 에니매이션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너무나 잘 설명해 내고 있는데, 나 역시 이 에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깔깔거리며 잘 만들었다고 생각만 했지 이런 철학이론이 내재되어 있는 줄은 잘 몰랐다. 이를테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사회에 작동되고 있는 합리적인 원리, 규칙, 질서, 코드 등에 간하게 반발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나의 욕망과도 일치한다.
왜 세상은 뭐든 정해진 대로만 돌아가는 것인가? 잘 생긴 사람이 출세할 확률도 많고, 잘 생긴 사람과 사랑에 성공할 확률도 많고, 부자는 부자끼리만 결혼을 해 부의 세습만을 노린다. 왕자와 공주는 만나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얼마나 재미없는 세상인가? 이런 가치 체계를 패러디를 통해 유쾌한 반란을 꾸면던 작품이 <슈렉>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통쾌해 했었던가?
저자가 말하는 <와호장룡>이란 영화는 어떠한가?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는 장자의 '무위'를 인용해 세상의 이치와 섭리를 잘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개인은 고려하지 않은채 학벌과 재산 늘리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요즘의 세태를 고집는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선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 흔들렸던 나를 다시한번 추스르게 되는 계기가 되서 저자에게 감사하고 싶을 지경이다.
이렇게 보면 철학은 지혜의 학문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가끔은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생각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를 때 이런 책 한번쯤 읽어 주면 생각이 정리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아무리 인문학의 쇄퇴를 걱정한다고 해도 우리가 인문학의 세례를 받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영화라고 하는 친숙한 매체를 가지고 이렇게 친절하게 철학을 풀이해 주니 읽으면서 흐뭇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철학에세이류에만 매달릴 것인가 회의도 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철학이 내게로 가까이 왔다면 언젠가는 내가 철학에 가까이 가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