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한 이치
코니 팔멘 지음, 이계숙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헤겔은 멋없이 글쓰기를 아예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이고, 칸트는 재치없음을 재치있음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야.

 

 

내가 저런 대화들에 골몰할 때 즈음 나는 코니 팔멘을 처음 읽었고, 읽는 당시 예쁜 무대처럼 보였던 남자들이 지금 다시 읽는 시간에는 하나의 커다란 현실로 느껴진다.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세 권 정도를 빌려읽은 까닭에 읽는 책은 좀 있었지만 내 책장은 빈곤했던 때에 코니 팔멘을 읽었고 알라딘의 플래티넘 회원이 되어 사는 책은 많지만 읽어야 할 책들이 서가를 채우고 있는 요즘에 코니 팔멘을 다시 읽었다. 다시 읽는 코니 팔멘은, 그대로, 읽는 그대로 냉정하고 담담하다. 그녀는 알랭 드 보통처럼 아주 노골적으로 속닥거리지는 않지만 조경란처럼 냉랭하게 말할 줄 아는 재주를 가진 작가이다. 한가지 다른 것은 철학적인 시도를 도처에 깔아둔 것 정도일지도 모른다.

 

 

 

냉랭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순간 이 책의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내게는 헛가렸기 때문이다. 남성적 자아와 여성적 자아로 굳이 주인공의 페르소나를 나눌 생각은 없지만, 어느 순간 읽다 보면 강하고 약함, 어지러움과 고즈넉함, 절제와 화려함 등으로 주인공이 나뉘어진다. 김형경의 주인공들은 그들마저도 여성적이었고 이윤기의 그들은 여성마저도 남성적이었다. 이것은 비단 글쓰는 사람의 한계라기보다는, 글쓰는 사람 그 자체의 개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니 팔멘은 신기하게도 강하고, 냉랭하고, 사물과의 거리를 둔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철학과 (여)학생의 이야기라지만 그녀의 생각하기가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그녀가 자기 자신을 잃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다.

 

 

 

내가 귀여운 여인일까.

사귀는 남자들마다 아마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귀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나름 나를 완벽하게 바꾸어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그들과 계속, 계속계속 함께 하지 못한 것은 그래도 마지막에 내가 나 스스로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하기는, 나는 사유 라는 말 대신, 생각하기, 라는 말을 쓴다. 사유, 라는 단어에서 오는 닫혀있는 느낌, 종결되고 고즈넉한 느낌보다 나는 무엇보다도 계속 변화하여 때로는 오락가락으로까지 보일 생각하기를 계속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하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도 내가 나 자신을 완벽히 버렸다면 누군가로 인해 고민하는 일은 없을테지만 내게는 그것이 못내 아쉽다.

 

 

언제나 모든 상황은 모 아니면 도가 아니었다. 모 아니면 도 는 선택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다가오는 것이지 상황의 과정 속에 담긴 무엇이 아니었다. 코니 팔멘은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아주 작은 로맨틱한 부분이었지만, 이를테면 무슈 륀이 물리학자를 만날 때가 그러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슈 륀은 그를 만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 다음,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언제나 생각을 해놓고서도 행동은 생각과는 반대로 하는 것이 그저 나의 히스테리컬함이라고 생각했던 독자로서, 이 부분은 놀라운 사상전환이었다. 어쩌면, 혼자 이런 것이 아니었다, 라고 자조적으로 일어섰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과 반대되는 선택이 있다. 어쩌면 그러한 선택들이 무슈 륀을 만들고, 나를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훌륭한 번역을 만들어주신 이계숙 님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 나는 못내 아쉬웠다. 잔잔하게 흥분하지 않고 일관적인 번역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드웨어적인 물질에의 고찰

알라딘에서는 이 책을 6400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에 만날 수 있었다. 6400원, 두 명이서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실 때 드는 돈 정도. 한 번 만남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명한 이치를 만나는 것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일이다. 뿐만 아니라 표지에 삽화를 이것저것 그리지 않고 최대한 심플하게 간 것도, 어두운 보랏빛과 검은색을 섞어 배열한 것도, 책 표지의 재질이 구겨지기는 쉽지 않게 코팅이 된 페이퍼백이라는 것도, 모두모두 마음에 든다. 몇 년을 지나 읽어도 좋은 책, 몇 년을 지나 보아도 또 좋은 디자인을 만난 것 자체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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