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기자의 책 읽어주는 남자
클로드 모르강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남자의 질투는 대체로 여자의 질투보다 위험합니다. 원초적인 완력이 주둥이를 놓친 풍선처럼 허공을 몸부림 칩니다. 손 닿는 곳에 치명적인 무기가 있을 때 남자의 질투는 삐끗, 자신의 인생까지 끝장내고 맙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 공기총을 들고 전처를 찾아간 사내가 있더군요. 그런데 가령 내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고, 나의 가장 친한 친구도 포로가 되어 같은 막사에 머무르게 됐는데, 그 친구가 내 아내와 열애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클로드 모르강(Claude Morgan)의 장편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원제:La Marque de l’hommme)이 아직도 저를 누르고 있습니다. 그 문장과, 그 줄거리와, 그 울림이 원체 커서 말이죠. 이 작품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교사 출신의 한 남자가 나중에 레지스탕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막바지. 장 베르몽이 독일 에델바흐의 포로수용소에서 갇혀 있다가 가장 절친한 친구인 자크를 만나는 대목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편지를 주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 우연히 드러납니다. 남편인 장과 나누는 편지 속에서 아내 클레르는 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 받는데, 자크와 나누는 편지 속에서는 인생과 예술을 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크는 장이 한번도 보지 못한 아내의 처녀 적 사진까지 간수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세상이 뒤집힐 일입니다.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열애 중일 것이란 질투심 앞에 자신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소설이 흘러가면서 장은 자크의 철학과 인생관에 점차 감화를 받게 되고, 저항과 투쟁은 왜, 사랑과 자유를 먹고 사는지에 대해 점차 깨닫게 됩니다. 아내의 진정한 애인이랄 수 있는 자크에게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조국을 통째로 배우게 되는 셈입니다.
병 때문에 수용소에서 풀려난 장은 고향으로 돌아와 또 한 사람의 레지스탕으로 태어납니다.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된 상태에서 아내와 고품격 사랑을 할 것 같은데 그때는 이미 아내가 또 다른 조직에서 레지스탕으로 활동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란 명작을 기억하세요?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인류 전체를 사랑하면 할수록 특정한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사랑하는 일은 적어진다는 사실이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특정한 사람을 혐오하면 혐오할수록 인류 전체에 대한 헌신의 마음이 들끓어 오르는지, 인간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동물입니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도 같습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한니발 렉터 박사가 클래식 음악의 선율에 심취하는 대목을 기억하시는지요.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묘미는 야만과 예술에 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흥미로운 메스를 가하기 때문입니다. 남편 장이 전쟁터로 떠난 사이 아내 클레르는 자신의 집을 점령한 독일 장교들과 거실을 공유하게 되는데, 그 중 한 독일 장교가 뛰어난 피아노 솜씨를 보여줍니다. 클레르는 그 독일 장교가 히틀러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그 독일 장교의 피아노와 독일의 위대한 음악가들의 세계로 흠뻑 빠져듭니다.
이번주는 이 소설책 한 권으로 누구의 주말도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