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잘 된 문장은 이렇게 쓴다
강신재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문학사상사가 지난 1993년 20주년 기념으로 출판한 책이다. 문인 50인 스스로가 자신의 문학생애를 돌아보며 어떻게 해서 문학의 길에 접어들게 됐는지, 문청시절 즐겨 보았던 책들은 무엇인지, 글은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마치 후배 문인들 또는 작가지망생들에게 조근조근 일러주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그 50인들 중엔 내가 암직한 문인들도 있지만 생소한 문인들도 몇 있었다. 그들은 왜 하나 같이 문학의 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지금이야 웬만큼 문필을 날리는 작가도 있지만 나 같은 만년 작가지망생들에게 조차 생소한 작가들은 왜 남이 알아주지 않은 길을 갔던 것일까? 읽다보다 보니 '그렇구나!'하고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또 그러다 보니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싶어했는지, 아직도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길에 왜 그리 미련이 남는 것인지 미망 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90년대 중반 한때, 독한 마음 하나 품지 못하고 단지 내가 그 시절 하고 있었던 일에 실패와 좌절을 겪고 있을 때 무작정 찾아간 곳이 시인 김정환 선생이 하는 '한국문학 학교'였다. 뭔가의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돌파구 보단 차라리 독한 마음을 품었더라면 지금쯤 뭔가 되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돌파구는 다른 돌파구가 생기면 이전에 돌파구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버리게 되는가 보다. 결국 나는 그곳을 끝까지 다지지 못하고 말았으니까. 1년도 못다니고 말았으니.

하기사 이 책의 소설가 박범신 씨는 문학은 고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 돌봐주는 사람없이 오로지 스스로가 성장하고 스스로가 헤쳐나가야할 길이라고 했다. 내가 그곳을 다녔다면 얼마나 다녀야했을까? 결국 글쓰기는 혼자해야 하는 것을.

그곳을 다니고 있을 때 소설가 심산 선생님은 말했다. 내 안에 뭣 때문에 글을 쓰겠는가가 확실해지면 글은 쓰게되어 있다고. 그러면서 그 선생님은 나에게 "넌 뭣 때문에 글을 쓰고 싶은 거니?"라고 물으셨을 때 나는 당시 우리 할머니, 고모들이 주기적으로 엄마를 괴롭히며 나에게 모욕을 줬던 쓴 기억이 생각나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그것 때문에 글을 쓰겠노라고 했다. 즉 말하자면 인간의 억압을 글로 형상화해서 해방을 모색해 보자는 그런 뜻이었나 본데 선생님은 "니 안에 그런 뜻이 있다면 넌 분명 글을 쓰게 될거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났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사이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고모들은 예전만큼 엄마를 괴롭히지도 않는다. 더 이상 고모들이 나를 모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루지 못했을까?

내가 문학학교를 다녔던 그 해도 지나고 나는 또 얼치기 희곡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연극팀 팀원들끼리 서로 싸우고 난리다. 그틈에 끼어 나는 내가 작품을 썼다라는 이유만으로 수모와 모욕을 당한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싸웠던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싫어서마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싸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다듬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연극 또는 나에게 있어서 희곡이란 분야는 그렇게 발전하지 못한 작업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인간이 혐오스럽고, 관계에서 오는 상처 때문에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우습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또 어느 틈엔가 잡초처럼 자라나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으니. 결국 나는 남이 알아주든 못 알아주든 글을 써야할 팔자인가 보다. 이왕 쓰는 글, 음지에서 쓰지 말고 양지에서 써야할텐데...

소설가 유순하는 이 책에서 "나는 글쓰기가 재미있다."라고 시작 하면서 <문학은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제목인가? 나도 글을 쓰고 싶어 안달하지만 목매달아 죽는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하기사 기형도 같이 어느 날 벤치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건 멋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해도. 소설을 쓰기 위해 독약까지 맛을 봤다는 플로베르의 교훈을 전하여 주는 작가 정건영의 보고는 또 어떠한가.

작가 최일남은 <문학은 평생을 해도 받을 수 없는 졸업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어느 작가는 퇴고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며 그 유명한 <무기여 잘있거라>를 쓴 헤밍웨이도 그 작품은 4백번 이상 고쳤다고 전해주고 있다. 나는 그 알량한 희곡 원고를 8번인가 9번까지 고쳐 보고 병이 났었는데...

아무튼 이런 글을 읽고 있노라면 위로도 되고 마음도 다잡게 된다. 평생을 해도 받을 수 없는 졸업장이라니 멀리 내다볼 수 있고 헤밍웨이는 4백번을 고쳤다니 7번을 손을 봐도 통과되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미리 실망할 것도 없다.

그런데 작가들이 하나 같이 말하는 다독, 다작, 다상량에 내가 어느만치 근접해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 책에 나오는 작가들의 세발의 피도 안된다.

다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글 쓰는 것에 두려워 말고 어쨌든 써야할 것 같다. 그리고 어쨌든 많이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졸업장 없는 문학이란 학교에 들어갔다 죽어 관에 실려 나와야할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다독, 다작, 다상량이란 말에 질려 버렸다. 50명의 문인이 하나 같이 이것을 말하고 있으니 질릴 수 밖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만큼은 이 말을 안 할려고 했는데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51번째로 얘기하고 있고 혹시 이 책을 읽으려 하는 사람은 재수없게도 그 말을 50번 마주쳐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문학엔 이 세가지만 빼놓고 왕도는 없는 법이니까. 마음 놓고 유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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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03-1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독, 다작, 다상량이야말로 유구한 진리지요.
요새 리뷰에 삘 받으셨나요? 리뷰 좋아요 ^^ 추천밥도!

stella.K 2006-03-1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다 플레져님 덕분이죠.^^

메르헨 2006-03-16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서도 안되니 그것이 문제라는...
전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으며 글 좀 쓰자. 책 좀 읽자...계속 그랬다는...^^

stella.K 2006-03-16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