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암흑기라도 꿈을 노래하고 사랑을 찬미하며

또, 이별에 아파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장유정 지음 | 민음in | 433쪽 | 2만2000원

“거리의 꾀꼬리요, 거리의 꽃으로 이 땅을 즐겁게 꾸미는 훌륭한 민중음악가― 그는 레코드계의 가수들입니다. 당신께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가수의 이름을 적어서 보내주세요.”

1934년 11월 잡지 ‘삼천리’에 실린 사고(社告)다. 1만여 장의 서신이 전국에서 답지했다. ‘최고 인기가수’는 여자 왕수복, 남자 채규엽으로 드러났다. 기생 출신인 왕수복은 정오에 평양에서 공연한 뒤 비행기를 타고 경성에 내려 저녁에 다시 청중 앞에 설 정도였다.

가수 고복수는 1936년 이런 회상을 했다. “공연에서 ‘타향살이’를 부른 뒤 여관으로 돌아오니 낯 모를 젊은 어여쁜 여자가 찾아왔겠지요. ‘선생님―!’ 하고는 그만 방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쫙쫙 흘리며 울겠지요.” 물론 팬이었다. 가수가 되고 싶어서 문을 두드리는 지망생들로 음반사 응접실은 불이 날 지경이었다. 기획자들은 “어떤 노래가 히트할지 통 알 수 없어. 대중들 기호란 워낙 예측하기 어렵거든” 하고 투덜거렸다. 1920~30년대의 조선 대중은 이렇듯 대중가요를 향유하는 모습에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자는 자신의 서울대 국문학과 박사학위 논문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가요 연구’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가수를 꿈꾸던 저자는 대학교 3학년 때 대학가요제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고, 꿈도 버려야 했다고 고백한다.

어느날 등교길, 버스 라디오에서 웬 트로트 한 곡이 흘러나왔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그녀는 그만 목놓아 울어버렸다고 한다. 도대체 트로트가 가진 그 어떤 힘이 그녀를 울게 했던 것일까.

▲ 일제시대 대중가요 전문가인 장유정 박사
저자는 묻는다. 그렇게도 가요에 열광했던 일제시대의 대중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처럼 계몽해야 할 무지몽매한 대상이거나 일제의 강압에 끌려 다닌 수동적 존재였던가?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그들 역시 꿈을 노래했고, 사랑을 찬미했으며, 이별을 아파했다. 삶이 부려놓는 일상의 정서는 지금과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숨쉬는 거리다”라고 노래한 1939년의 ‘감격시대’에 대해 “그 시절에 환희를 노래하다니, 이건 전쟁을 찬미하는 게 아니냐”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희망을 꿈꾼다는 내용은 시대가 절망에 빠져 있음을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우리 구비문학사에서 면면히 이어진 ‘선취(先取)된 미래의 소망’, 언젠가는 오고야 말 밝은 미래를 현재형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계승하고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일제시대 트로트의 당당한 복권(復權)을 시도한다. 트로트의 기원이 일본의 엔카에 있다지만, 그렇게 따지면 외래가 아닌 장르가 얼마나 되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노랫말에 한국인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반영됐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호응과 이에 따른 상업 논리는 강요나 강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트로트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고 어루만졌다. “한강물 푸른 줄기 말 없이 흘러가네/ 천만 년 두고 흐를 서울의 꿈이런가”고 노래한 ‘서울 노래’(1934)나 “삼백연 원안풍은(300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라 읊은 ‘목포의 눈물’(1935)은 상실감과 초극(超克)의 의지, 나아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당대의 조용필이나 비에 해당했던 채규엽은 유행가에 대해 “희로애락의 정서를 가장 교묘하게 표현한 불후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이 책의 주제와도 긴밀히 연결된다. 그렇다면, 요즘의 가요에 대해 70년 뒤 사람들은 과연 어떤 평가를 할 것인가.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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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03-1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심히 땡긴다.

물만두 2006-03-12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이 지나면 아마도 객관적 해석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