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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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나는 이 책을 잘 알지 못했다. 15년 전에 이미 절판이 되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원했다는 것도 몰랐고, 이제 번역은 하지 않겠다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철칙을 깨고 번역을 했다는 것도 이번에 새롭게 복간이 되고서야 알았다. 이만하면 누구라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질만 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요즘 유행하는 재밌고, 즐겁고, 행복과 위로를 주는 그렇고 그런 책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선상에 있다.

 

정말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고, 불편했다. 한 가족의 불행한 역사를 어쩌면 그리도 유려하고도 냉철하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을까? 그러기에 독자로서 느껴야 하는 그 같은 감정은 더욱 선명하고 또렷해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전혀 새롭거나 이해 못할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몰몬교에 대해선 모르는 사람은 새로울 수도 있겠다. 

 

나는 이렇게 불행하게 몰락해버린 가정이라면 특별한 이유나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흔히 있을 수 있는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행복하고, 따뜻한 이상적인 가정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정은 TV 드라마에나 나올 법하고, 설혹 있다고 해도 많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가정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저자 마이클 길모어가 살고 자랐던 가정은 우리가 이제까지 흔히 보아 온 불행한 가정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과격하고 폭력과 폭언을 일삼고, 어머니 역시 집이 싫어 도피하듯 결혼을 했지만 자신이 더 안 좋은 선택을 했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모든 것을 돌이킬 수가 없었고, 그저 나약하고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폭력은 되물림 된다는 것을 길모어 가의 형제들도 어김없이 보여 준다. 그나마 그 4형제 중 첫째와 막내면서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길모어만 다소 피해간 느낌이고, 가장 큰 피해자는 둘째와 세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저자는 형 프랭크의 남다른 기억력에 의존하여 이 책을 완성할 수가 있었다.

 

가정마다 가족의 역사와 그에 따른 가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바람직하고 개개인을 건강하게 할만한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게 한 가족의 역사를 복기할 때마다 떠올려야했던 아픔과 상처는 얼마만한 것일지 우리는 이렇게 700페이지 가까운 책을 대하지만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이건 길모어 가만의 이야기는 아니며, 현재에도 너무나 많은 가정이 이와 같거나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랬을 때 파생될 수 있는 문제는 인간 파과와 범죄의 증가다. 물론 불행한 가정이라고 해서 꼭 범죄를 양산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피해가지 못하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또 이것을 가정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이젠 적극적으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물론 사람은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고 생활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가정을 떠나 있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런 의식의 전환과 사회안전망의 확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책은 그동안 첨예한 문제를 낳았던 사형제도를 수면 위로 다시 한 번 떠오르게 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저자의 형 게리 길모어가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그때까지 잠잠했던 사형제도를 부활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게리의 선택이며 그것만이 자신의 의지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은 가족에게 아픔과 상처로 고스란히 남았고, 사형 반대자들을 자극하게 만들었다.

 

물론 책은 어떠한 결론을 유도하기 위해 쓰여진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사형을 받아야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의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역추적해 볼 때 과연 사형이 존치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것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첨예한 문제임엔 틀림없다. 아무리 극한 죄를 졌다고 해도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겠느냐는 인도주의적 견해가 아니더라도, 사형이 아니라면 피해갈 수 있는 죽음 즉 법정이 오판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수도 있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죄는 그 한 사람이 졌지 가족이 지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그 가족까지 고통을 떠 안아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점에서는 사형은 없어져야 할 제도이긴 하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내 가족이 또는 이웃이 무참히 희생을 당하고, 사회에 피해를 입힌 사람이 사형 당해야 마땅한데 버젓이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무기수 내지는 살아선 절대로 교도소 밖을 나올 수 없는 무거운 형기를 받은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사회에 있을 때 무슨 죄를 져도 사형은 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역이용해서 범죄는 더 악랄해질 수 있고, 교도소 안에서 무슨 짓을 버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인도주의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저자의 글을 통해 게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최후를 맞이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는 자신의 의지의 승리를 위해 사형을 받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자신을 극단으로 몰아갈 권리는 그 자신에게 없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자기 자신을 모두 다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직 세상과 자신의 가족 특히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으로 감히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옳은 선택이 아니며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음이 먹먹하고 아프다. 이 쉽지 않은 글 그래서 자칫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는 글을 끝까지 밀고 나갔던 저자에게 늦게나마 심심한 위로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바라기는 제발 이 세상에 더 이상 가정 때문에 상처 받고 괴로워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아주 없을 수는 없을 테니 조금이나마 줄어들고, 그 고통속에서 벗어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가정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능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면 그것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울타리를 과감히 박차고 나오는 것도 자신이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다. 그것이 가정의 중요성이 개인의 구원 보다 앞설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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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8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8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6-03-1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뉴스에서 나오는 아동학대 사건들도 그 가정을 나와 버렸으면 목숨만은 살 수 있는 거였지요. 그래서 님이 쓴 마지막 문장에 저도 무게를 두게 되네요.

가정 폭력 문제는 덮어 둘 문제가 아니라 자꾸 노출시켜서 그 심각성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어요.

stella.K 2016-03-18 13:00   좋아요 0 | URL
그래서 문장을 바꿨는데 생각해 보니 언니 말이 맞더라구요.
이놈의 오탈자, 문장 맞춤법은 좀비 같더라구요. 고쳐도 고쳐도
볼 때마다 나타나요.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가정이 개인을 보호해 줄 수 없다면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신 갈수있는 곳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게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