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 - 스물셋 청년 하용조의 친필 일기
하용조 지음 / 두란노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책이 기존의 형태 달라 조금은 놀랍고 신선했다. 아무래도 일기집이다 보니 조금은 다른 시도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건 페이지마다 글자 수가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 난 글자가 빽빽한 책을 좋아하는데 그 부분에선 조금은 실망했다. 하지만 이내 또 놀라운 건 하용조 목사님의 육필을 그대로 실었다는 것이다. 물론 다는 아니고 일부가 그렇다는 거다.  

 

그 육필을 보고 있노라면 하용조 목사님도 어지간한 악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생전 이 분은 일기를 쓸 때 한자를 병행해서 썼나 본데, 물론 한자라 이해하지 못할 독자를 위해 옆에 한글을 덧붙여 놓긴 했지만 이분이 워낙에 악필이니 한글 병용은 불가피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또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 일기집은 목사님의 청년 시절 지병인 폐병을 앓았던 시절에 쓴 일기다. 아무래도 글 쓰기가 건강할 때 보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남자가 쓴 일기다. 여자 같으면 주저리 주저리 썼을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남자는 일기를 잘 쓰지 않거나 써도 길게 쓰지 않는 편이니 그 속성이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이 일기를 쓰고 그는 지금 천국에 있다. 아득하고도 왠지 모르게 가깝게 느껴지는 건 왜 일까? 나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일기를 쓰시진 않았지만 가계부 비슷한 것을 쓰셨다. 무슨 생각이셨는지 당신이 가지고 계신 돈 중 하루하루 얼마를 지출하셨는지를 거의 매일 쓰셨다. 돌아가시고 유품 정리할 때 그 수첩을 발견했는데 묘하게도 천국과 지상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누구더러 치우라고 매일 꼬박꼬박 쓰셨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일기였다면 내가 보관했을 텐데. 

 

하용조 목사님의 일기집을 읽고 있으려니 몇년 간 다니던 교회를 잠시 접어두고 이분이 시무하셨던 교회를 다녔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교회 다니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왜 이렇게 상처가 많았는지. 보통 그렇게 되면 교회를 떠나기도 하겠지만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분의 교회로 잠시 피신 가 있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하용조 목사님의 교회는 치유나 회복을 위한 교회로 유명했다.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던 때는 목사님 역시 병 때문에 잠시 강단을 떠나 계셨다 복귀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고 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참 푸근했다. 특별히 설교를 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뭔가의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처럼 편안하게 설교하는 것이 그분의 장점이었다. 그때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그분은 하나님의 사역을 너무나 신나고 즐겁게 여긴다는 것이었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난 이렇게 힘들어 만신창이가 된 느낌인데. 그분은 언젠가 설교에서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고난을 다 가져가셨는데 우리가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며, 고통스럽게 사역해야 하냐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으니까 우리도 고난 당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일하는 건 그분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 그게  코미디 같은 이야기일 것 같지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이분이라면 말이다. 

 

그분의 사역의 특징은 특별히 사람을 붙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교회주의를 몹시 싫어하셔서 교회를 6, 7년 다녔으면 다니던 교회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새 교회를 섬기러 떠나라고 하셨다. 그건 정말 훌륭한 목회 마인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떠나 있을만큼 있어서였는지 나는 다니던 교회로 복귀했다. 그리고 거의 이분의 설교는 듣지 못 했다. 그 교회를 떠났으니 안 들었다는 게 더 맞는 얘긴지도 모르지. 그런지 몇년 뒤에 부음 소식을 들었다.

 

일기는 온통 예수님 믿는 감격으로 가득차 있다. 누구는 은유로서의 질병으로 현대는 암이겠지만 3, 40년 전만해도 폐병이라고 했다. 그런 병을 젊은 날 걸리고 일기를 썼다니 뭔가 있어 보이긴 한다. 일본의 저명한 기독교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도 생각이 나고. 그러고 보면 육체의 질병이 꼭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내면이 더 단단해지고 그래서 질병을 치유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질병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절망이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말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하용조 목사는 자신의 병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바울의 가시에 비유하면서. 

 

이 책을 읽으니 하 목사님의 목회 성공의 비결이 어디에 있었을까를 대략 짐작해 본다. 그것은 자신의 질병을 결코 절망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고, CCC 같은 선교회에서 하는 훈련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감당했다는 것이며, 여러 다양한 사람과 편지를 교류 했다는 것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다 못해 일종의 채무의식으로까지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르긴 해도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한 세대는 딱 이분 세대까지가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신앙의 순수는 요즘 떠는 보수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조차도 구원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떠드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아예 주일 하루 교회에도 가고, 성당도 다니며, 절에도 가 보라고 권한단다. 신앙을 마음의 수양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신앙의 순수함이나 진지함이 있을까 싶다. 어느 한 가지도 순수해질 수 없고 진지해질 수 없으면서 수양만을 운운한다는 건 다 가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요즘 흔한 테라피나 힐링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믿음의 대상이 그것 밖에 되지 않는다면 굳이 뭐 때문에 신앙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설교다운 설교는 없고 강연만 넘쳐난다.  이분의 신앙의 진지함은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오늘 나는 무엇을 했는가?

평범한 하루가 아니었던가?         

이처럼 귀중한 시간은 없다.

나는 이렇게 살 수가 없다.

생활을 혁명하고, 타성을 깨며, 습관을 혁명하자. 정말 이렇게만 살 수 없다.

 

나를 봐라.

나를 봐라.

이상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봐라.

 

주님, 나의 사랑하는 주님 비참한 저의 상처 난 마음을 보살펴 주옵소서.

아무리 가도, 아무리 하여도 저는 주님을 울렸습니다.

못된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117p)

 

신이 있기에 인간은 참으로 위대하다.

고민과 고통은 그러기에 진실히 부딪히게 된다.

신이 없이 인간을 추구하는 허구,

아! 사랑하는 주님이 있기에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 살아 계시기에

이렇게 괴로운 것이다.

어찌 이러한 분노를 인간은 아무런 연민 없이 당해야 한단 말인가.       (141p)

이런 진지함이 오늘 날에도 가능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묻지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이분만큼은 아니지만 예수님 믿는 감격으로 뜨겁고도 두근두근 했던 때가 있었다.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지금은 교회서가 아니면 찬송을 흥얼거리는 일 조차 거의 없어졌다. 한때는 목사라는 사람이 좀비가 되어 영혼을 잃어가고 있는데도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주님께 따져 묻던 나 역시 영혼없는 크리스챤인지도 모른다. 갈수록 침잠해 들어간다. 그러면서 주님을 울리고 있다. 이 책이라도 붙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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