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연재/18C 미친 바보들]나는 존재한다 고로 기록한다

잡식성 기록정신… 듣고 본 것은 모조리 적어
일기는 생활사자료 보고… 곡식값·제사음식까지 적혀
기록통한 '지식경영 노하우' 총서편찬 열기로 이어져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말 위에서 외 무릎을 세우고 빈 공책에 수시로 메모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객관에 들면 그는 매일 많은 시간을 그날 보고 들은 내용을 메모하고 정리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환희기(幻戱記)’ 같은 글은 중국서 본 요술 공연을 기록한 것인데, 무려 20가지의 요술 레파토리가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금 같으면 캠코더로 촬영하여 온다고나 하지만, 당시 20가지나 되는 레파토리를 하나하나 상세히 묘사해 낸 것을 보면, 공연 현장에서도 그의 눈과 손은 동시에 바빴을 법하다.

홍대용이나 박지원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 간 당시 사신들의 필담 기록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온전한 녹취록이다. 두 사람은 양편에 종이를 수북히 쌓아놓고 필담을 시작한다. 대화에 따라 종이가 오가다 보면, 나중에는 내 앞에 있던 종이는 상대에게 가 있고, 상대의 종이는 내 앞에 쌓인다. 대화가 끝나면 서로 적은 것을 맞바꿔 한 벌씩 베껴 적는다. 나눠 가지면 두 벌의 완벽한 녹취록이 완성된다. 그러면 그 기록을 가지고 돌아와서 문답에 맞춰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지금 남아있는 수많은 연행록은 모두 이런 꼼꼼한 기록 정신의 산물이다. 그들이 무슨 기억력의 대가여서 훗날에 기억해낸 것이 아니다.


▲ 연암 박지원도 같은 공연을 봤을까? 중국 기예단의 공연 모습. 박지원은‘환희기’에서 20가지가 넘는 공연의 레퍼토리를 캠코더로 찍듯 상세히 기록했다. 조선일보 DB
이전 시기에도 ‘미암일기(眉巖日記)’나 ‘난중일기(亂中日記)’가 있었지만, 18세기의 일기문학은 이 시기 잡식성의 지식 경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만주(兪晩周·1755-1788)의 ‘흠영(欽英)’은 21세 나던 1775년부터 죽기 한 해 전인 1787년까지 13년 간 매일 써내려 간 일기이다. 모두 24책 156권의 거질이다.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재난고(?齋亂藁)’ 또한 평생에 걸쳐 쓴 일기로 52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들 일기는 한마디로 18세기 생활사 자료의 보고다. 경제활동과 문화 예술 활동, 독서 편력과 과학사 관련 자료, 시정의 풍습까지 없는 내용이 없다. 유만주는 60년간 일기를 쓸 것으로 생각하여 60부, 10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계획했다. 그는 일기에 고금아속(古今雅俗)을 막론하고 듣고 보고 느낀 것을 다 적었다. 제사 때 올린 과자와 고기의 종류부터, 아픈 데 쓴 약의 종류, 언제 옷을 갈아입었으며, 당시 곡식의 값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내용까지 시시콜콜히 다 적었다.

이들은 일기를 단순히 나날의 기록으로 생각하는 대신 한질의 백과전서적 전작으로 인식했다. 18세기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의 실상이 이 일기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유만주는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 했을 만큼 자신의 생애를 걸고 이 일기를 써내려 갔다.

그들은 사소한 일상의 기록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쉴새 없이 메모하고, 틈만 나면 정리했다.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도 말 그대로 듣고 보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적어둔 비망록이다. 나를 거쳐간 생각과 정보는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편지를 보낼 때도 반드시 부본을 한 부씩 남겨 두었다.

이덕무가 세상을 뜬 후, 이서구는 평생 이덕무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글을 한 장 한 장 펴서 배접하여 책으로 만들어 이덕무의 아들에게 보내주었다. 문집에 실린 수십통의 편지는 그렇게 해서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었다. 최근 서울대박물관에서 공개한 연암 박지원의 편지첩은 안의 현감과 면천군수로 있을 때 집에 보낸 30여통의 편지를 날짜 순으로 정리해 둔 것이다.

기록과 정리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 다양한 지식 경영 노하우의 축적은 총서(叢書) 편찬 열기로도 이어졌다. 중국에서 ‘한위총서(漢魏叢書)’나 ‘소대총서(昭代叢書)’ 또는 ‘설부(說?)’, ‘단궤총서(檀?叢書)’와 같은 총서류 저작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들이 한 일을 우리라고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박지원은 ‘삼한총서(三韓叢書)’를 기획했다. 중국과 우리 옛 문헌에서 우리나라와 외국과의 교섭과 관계된 기록들을 가려 뽑아 한 질의 총서로 만들려 했다. 현재 남아있는 목록에는 모두 178종의 서책이 나열되어 있고, 이는 당초 계획의 10분의 1,2에 불과한 분량이다. 이 책이 완성되었더라면 고대로부터 근세까지의 한중교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만주는 ‘해내총서(海內叢書)’와 ‘해외총서(海外叢書)’를 동시에 기획하고 그 서목을 정리했다. 중국에는 ‘한위총서’가 있는데, 문헌의 역사가 천년이 넘는 우리는 그 많은 문헌들이 흩어져 있어 하나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으니, ‘해내총서’를 정리하지 않을 수 있겠냐며, 시대별로 묶어 384종의 목록을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설부’를 본떠 ‘통원설부(通園說?)’를 엮었다. 통원은 그의 호다. 모두 28목(目)으로 구분하여 우리나라의 온갖 기이하고 희한한 이야기를 가려 모았다. ‘설부’의 조선 버전을 엮은 것이다.


▲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서유구(徐有?·1764-1845)는 ‘소화총서(小華叢書)’를 기획했다. ‘삼한총서’와 달리 역사와 문화, 학술을 아우르는 방대한 종합적 총서였다. 우리나라의 저술을 경익(經翼)·별사(別史)·자여(子餘)·재적(載籍)의 4부로 나누어 경전 해석과 관련된 저술, 역사와 관련된 것, 그밖에 경세실용서들을 망라하고자 했다. 체재는 ‘한위총서’를 본뜬 것이었다. 애초에 이같은 방대한 총서의 기획은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평생에 걸쳐 모은 방대한 장서와 의욕적인 독서, 주변 동지들의 협조를 믿고 이 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모두 힘에 부쳐 완성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이들의 고양된 문화적 자신감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기록한다> 멋진 말이긴 하다.

하지만 기록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허접한 글나부랭이나 쓸 생각말고 기록이나 해야할 것 같다.

일기를 써 본지는 또 얼마나 오래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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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5-09-0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한때는 다이어리 참 열심히도 썼는데 요새는 전혀...
한 7~8년동안은 거의 안쓴것 같아요.. 헉...
ㅡ,.ㅡ

stella.K 2005-09-0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