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때 <들장미 소녀 캔디>란 순정 만화를 TV에서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만화가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을 때 나는 안타깝게도 그걸 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동시간 대에 타 방송에서 모험 가득한 만화를 하고 있었고, 오빠와 동생은 늘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 시절만해도 TV가 한 대뿐인 우리집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결국 내가 그 만화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동생만 보는 것 같으면 싸우던지 구워 삶던지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오빠까지 보고 있으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오빠는 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보통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만화영화는 어린이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서 잘 안 보는 것 같던데, 남자들이 좀 늦되는 줄은 알았지만 오빠는 늦돼도 한참 늦돼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차마 뭐라고 할 수는 없었고, 난 그저 속으로 오빠가 얼른 커서 만화를 졸업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정서적 성장이 오빠의 그것을 앞질렀던 걸까? 정말 중학교에 올라가니 만화가 시큰둥해졌고, 오빠는 여전히 만화를 떠날 줄 몰랐다.[1] 그래도 캔디에 대한 미련은 남아서 어느 날 <들장미 소녀 캔디>가 만화책으로 나온다고 했을 때 솔직히 마음이 설레었다. 캔디가 책으로 나오다니, 유후~!

 

그런데 솔직히 말해 캔디가 좋아서겠는가? 캔디에 나오는 테리우스와 안소니가 좋아서는 아니겠는가? 거기에 이웃집 키다리 아저씨 같은 길버트도 빠지면 섭섭할 테니 덤으로 좋아해 주고.

 

이렇게 거기에 나오는 남자들은 누구 하나 버릴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소니와 테리우스의 성격은 극명하게 갈려서, 안소니는 자상하고 조용한 것이 여성취향적인 반면, 테리우스는 반항적이면서도 야성적이었다. 그래서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 의견이 분분했고, 그에 따라 물론 단편적이긴 했지만 그 시절 여학생들의 이성에 대한 취향을 알아보기도 했던 것이다[2]. 그리고 내가 알기론 테리우스가 안소니 보다 인기가 더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의 인기 요인이 한 가지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당시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이야기의 배경과 작풍이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만화가 익살스럽거나 다소 튀는 느낌이었다면 이 작품은 다분히 부드러운 여성의 곡선을 살리고, 풍부한 감성적 요소를 최대한 살려 누구라도 보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매력이 있었다. 특히 꽃미남의 역사는 이때부터는 아니었을까 한다.[3] 물론 지금은 세련된 작품이 워낙 많이 나와 이것을 새삼 논한다는 게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난 그토록 보길 원했던 만화를 또 뭐 때문인지 사서 보지 않고 빌려 볼까도 생각했었다. 여간 해서 책을 빌려 볼 줄 몰랐던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앞서 말했지만 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난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들장미 소녀 캔디라구.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그게 만화책으로 나왔다는데 지금 돈 생각하며 튕기겠다는 거야? 그건 캔디에 대한 배신이야, 배신.

그랬다. 만화책은 책이 아닌가? 그런 차별을 두다니. 이건 내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의 이런 생각은, 만화가 인기가 있긴 있었는지 빌려달라는 사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은 빌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구차하게 물어보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내가 언제부터 책을 빌려봤단 말인가 하는 자각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책은 사놓고 혼자 몰래 봐야 한다. 그런데 그때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책을 학교까지 들고 다니면서 누가 보거나 말거나 버젓이 꺼내놓고 봤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옛날처럼 유혹하고 싶었던 아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빌려달라고 할 땐 빌려 줄 사람이 그렇게 없더니 어느 날, 평소 친하지도 않던 옆 반의 아이가 눈꼬리를 살살 치며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성격상 어떤 책이든 친한 사이가 아니면 별로 빌려주고 싶지 않은데, 그 아이는 그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페로몬을 나에게 너무 많이 분사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또 나는 나도 그 책을 그 아이에게 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빌려 줄 나도 아니었다. 거기엔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그것은 수업 시간에 절대로 읽지 말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업시간에 몰래 보다 선생님께 압수당해 그 자리에서 찢겼다는 소문을 들어 온 터라 혹시 나도 혹시 그렇게 될까 봐 그 아이에게 다짐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그 아이도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왠걸, 그렇게도 당부를 했건만 그 아이는 내 말을 어기고 수업시간에 그 만화책을 보다 선생님께 걸려 똑 같은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깐깐하기로 유명한 지리 선생님한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참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인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스스로 조건을 걸면서까지 그 아이를 믿고 싶었던 걸까? 빌려 주고 싶어하지 않았던 아이에게 만화책을 빌려줘야 했던 나로선 그것이 최선이었을까? 그 아이도 그렇다. 남의 책을 빌려 보는 것에 대해 최소한의 약속도 지켜줄 수 없는 그 아이는 책을 빌려 볼 자격이 있는 걸까?

 

그 소식을 들으니 기분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을 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참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아이에 대해 그다지 끌리는 바는 없었는데 그 생각에 방점이라도 찍듯 같은 반의 다른 아이가 내게 와, 그 아이에게서 책을 돌려 받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돌려 받으려면 독한 마음 먹고 끝까지 받아내던가, 그럴 마음이 아니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낫다. 내가 무엇이 아쉬워 그 아이에게 그 만화책을 돌려받지 못한단 말인가? 빌려줄 땐 못 이기는 척 하고 빌려줬지만 나도 못지 않게 강하다는 걸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역시 말대로라고 생각했다. 역시 예의 그 눈꼬리를 살살 치며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마음을 강하게 먹고 낮고도 강한 어조로 책을 변상해 내라고 종용했다.

 

그러자 그 아인 이런 나의 태도에 압도 당했던 걸까? 의외로 순순히 내 책을 변상해 주는 것이었다. 난 순간 좀 당황했다. 성난 복어처럼 잔뜩 무게를 잡았건만 이러면 김 빠지는 건 아닌가? 하지만 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책을 변상 받았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좀 우스웠다. 그 아이가 나를 유령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우리 반에 오거나 복도에서 마주쳐도 도무지 알은 체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런 일련의 일들이 있었다고 해서 그 아이와 내가 이후로도 역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모른 척 한다는 건 나로서도 좀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빌려 달래서 빌려줬고, 응당 변상을 요구해 그것을 돌려 받았으니 나도 더 이상 이 아이에 대해 감정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구를 유령취급 한단 말인가? 정말 이것 밖에 안 되는 아이였나 싶은 게 입맛이 썼다.

 

솔직히 변상 문제는 내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하고 사과를 해야 원칙이다. 그렇다고 책을 변상 받을 때 재대로 된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마치 안 해 줘도 되는 일을 해준다는 태도로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모른 척 하고 손을 털려고 했다. 과연 사람은 겪어보니 알겠다 싶었다. 

 

요즘 같이 책이 흔한 시대에 뭐 그런 일이 있나 싶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이란(그것이 아무리 만화책이라도) 함께 나누고 공감하자고 빌려주고 빌려보는 건데 그 시절 그 아이나 나나 좀 미숙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도 책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을까? 돌려 받을 목적으로 말이다. 돌려 받겠다고 빌려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에 대해 빌려주는 사람이나 빌려가는 사람이나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고 그렇게 하는 것일까? 책이 흔해진 세상에서 없으면 또 사지 하거나, 알아서 돌려주면 모를까 어떻게 야박하게 돌려달라고 그러냐고 해서 돌려 받지 못하는 책이 있지는 않은가?

 

옛날부터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고 해서 서로 채무의식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 걸까?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란 말을 합리화 해서 공공도서관 같은 곳에서 반납 받지 못하거나 훼손 당한 책만 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한때 좋은 마음으로 지하철에 무인도서관을 운영했지만 회수율이 저조해 아예 문을 닫기도 했다는 말을 듣는다. 조용히 도로 갖다 놓으면 더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을 수가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 생각에 책임의식이 희박해서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책 귀하면 남의 책도 귀한 법이다.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란 말은 언제 왜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만화책은 책이 아니란 말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만화 좋아하는 사람이 알면 섭섭해 할 일이다. 

 

요즘 같이 책이 흔해진 세상에 누구는 책 보다 사람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오히려 거기서 그 사람의 인격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만화책이라도 말이다.

 

어느 때, 누구에게든 지키고 싶은 책이 있다. 그게 남 보기엔 아무리 하찮은 책일지라도 말이다. 그것을 서로 존중해 줬더라면 적어도 그 친구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란 말은 그것으로 인해 한번쯤 상처 받아본 사람에겐 확실히 염장 지르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나저나 그때 지리 선생님은 어쩌자고 그 귀하디 귀한 만화책을 그렇게 가차없이 찢어버리셨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시절 만화가 대접 받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후 내가 대학 들어갈 즈음엔 만화는 제 8의 예술이라고 해서 그 위상이 몰라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면 선생님은 그냥 가지고 계셨다가 주위를 주는 선에서 마무리했어도 그 아이는 알아 듣지 않았을까? 어쩌자고 선생님은 그런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는지 모르겠다.


 

[1] 오빠는 고등학교를 들어가서야 비로소 만화를 안 보기 시작했다.

[2]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남학교와 여학교가 엄격히 구분되었던 때라 그런 것으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그런 식으로 투사하고 풀었던 것. 그래서 캔디가 더 인기였고. 

[3] 아마도 그러한 작풍은 이후 나왔던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루이 14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를 그렸던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완성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재미있었던 건, 거기에 보면 오스칼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작품에선 그다지 많이 다룬 것 같지않지만 사실 이 인물이 여잔데 마리 앙트와네트와는 내연의 관계라고 해 동성애를 조장했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했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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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7-0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만화책을 '쓰레기'에다 '나쁜 것'으로만 여겼고
아직도 이 흐름은 다 가시지 않았어요.

잘 살펴보면, '만화비평'이란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신문이고 잡지이고
만화 신간 소개를 하는 기자는 찾아볼 수도 없으니까요 ^^

이제 와 돌이켜보면
이렇게 '오늘 새롭게 이야기를 쓰도'록
그때 그러한 일이 우리한테 찾아왔을는지 몰라요.

교사들도 그만 한 만화책은 스스로 읽어 보면
푹 빠져들었을 텐데... 아무튼......

stella.K 2014-07-07 18:04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그렇네요.
만화비평이 없어요. 가장 대중적인 매체 중 하난데 말입니다.
만화에 대한 위상이 예전보다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이 미흡하죠?
잘 지적하셨네요.

솔직히 지금도 그런 선생님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아이들 보는 앞에서 책 찢고 그런 몰상식한 일은 좀 삼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압수했다 돌려주면 되는 것을.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만이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물론 1차적 책임은 수업시간에 딴짓하는 학생이 잘못이긴 하지만요.;;

2014-07-07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8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