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좋아하는 시집은…
계간지 '시인세계' 156명에 물어
입력 : 2005.05.16 18:05 29'
선대의 시집은 후대들이 나아갈 처녀지를 비춰주는 등대가 된다.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백석 ‘여우난골족’ 부분/ 시집 ‘사슴’).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발행인 김종해)는
여름호 특집에서 한국 현대시인 156명에게 물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집은?”
답변은 ① 백석 ‘사슴’ (1936·선광)
② 김수영 ‘거대한 뿌리’ (1974·민음사)
③ 정지용 ‘정지용 시집’ (1935·시문학사)
④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0·문학과지성사)
⑤ 서정주 ‘화사집’ (1941·남만서고) 순이었다.
일반 독자들의 애송시 설문 때 늘 1, 2위를 다투던
윤동주와 한용운의 시집이 10위권 안에 들지 못했다는 게 특이했다.
문학평론가 김인환 교수(고려대)는 ‘우리 시대를 빛낸 다섯 권의 시집’
이란 글에서 5인의 시적 특색을 이렇게 정리했다.
지용과 미당은 채(彩)요
백석과 수영은 기(氣)요
성복은 기채간(氣彩間)이라
한국 현대시에 ‘예술가의 계보’와 ‘투시자의 계보’가 있고,
이 두 흐름이 이성복에게 모아져 모험을 찾아 떠나는
최근의 시인들에게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뭉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 석
* 첫시집 [사슴] (자가본, 1936)
읽으면 배시시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나도 ' 캐릭터 ' 다음에다가 어떤 물건을
하나 더 달고 싶어진다.
뭘 넣을까. 모닥불 속에 타고 있는 것들은
다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들이다.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 타는 모닥불가에
가문의 가장 어른이신
문장과 강아지까지 어울려 불을 쬔다.
참 재미있다.
아름답고 따뜻한 평등과 평화다.
- 김용택
봄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무처 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늘이어. 피가 잘 도라.... 아무 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 서정주
그가 갔다. 텅빈 겨울이 하늘이 시리다.
이제 누가 있어, 이 징그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징그러운 노래를 부를 것인가.
뱀이 눈뜨는 이 산하의 봄을 누가 말해줄 것인가.
그의 영광과 오욕은 바로 나의 얼굴이었다.
시의 이마에는 몇방울의 피가 늘 묻어 있다고 말하던 시인.
그의 죽음으로 길고긴 서정의 한 시대가 접힘을 느낀다.
- 김용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