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제이 보고서> "세상에 비정상적인 섹스는 없다"
性학자 킨제이의 일생
1만2000명 성생활 인터뷰 편견과 오해없이 담아
입력 : 2005.05.12 15:20 54' / 수정 : 2005.05.12 15:47 46'
‘킨제이 보고서’에 대한 첫 번째 오해. 인디애나 대학 동물학과 교수 앨프리드 킨제이(1894~1956)가 쓴 것은, 거칠게 비유하면 딱딱한 학술서지 ‘플레이 보이’가 아니다. 물론 그의 책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1953)과 ‘플레이 보이’의 창간 시점이 겹치기는 했지만.
‘킨제이 보고서’에 대한 두 번째 오해. 빌 콘돈(철학 전공이다)의 데뷔작인 이 동명의 영화에서 에로스적 상상력을 먼저 떠올렸다면, 당신은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것. 영화 ‘킨제이 보고서’는 문제적 인간 킨제이의 문제적 인생에 관심을 둔 전기일 뿐, 순진한 관객의 성적 욕망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인간의 성적 행동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 오해를 풀기 위해 러닝타임 두 시간을 전력투구한다. 무려 1만2000명에 달하는 인터뷰를 실시했다는 ‘전설’을 강조하듯, 영화는 설문을 담당할 인터뷰어에게 인터뷰 기법을 교육하는 킨제이(리암 니슨)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스로 실험 대상이 되어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순간. 자신의 어떤 성 역사(sex history)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생생한 경험을 털어놓던 킨제이는 “유년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는?”이라는 갑작스런 질문에 말을 잇지 못한다. 영화는 이제 사사건건 보수적인 아버지와 대립하던 반항적 아들의 청년시절로 회귀하고, 자연과학의 엄밀함을 바탕에 깔고 있는 프로이트의 시선으로 인간 킨제이의 일생을 재구성한다. 내면의 심리를 패션의 변화로 묘사하는 최근 영화들처럼, 단색 모노톤 재킷을 벗지 않던 소년 킨제이는 이제 다채로운 의상을 소화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왕성한 연구를 계속하는 중년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성적 행동을 연구하기 전까지 킨제이 박사의 관심은 벌 떼였다. 수백만 마리의 표본을 십수년에 걸쳐 하나하나 모으며 그가 발견한 것은, 이 손톱만한 생물조차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1만2000명을 인터뷰하며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으로 사람의 성 행동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다’와 ‘드물다’로 나눌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카메라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편집증적으로 연구에 집착하는 킨제이의 행동에 주목한다. 제자 출신의 아내 클라라(로라 리니)가 “너무 아프다”며 첫 섹스부터 힘들어하자, 체면불구하고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가 “남보다 처녀막이 두껍다”는 대답을 받아내고, 나중에는 인간의 양성애에 관한 입증을 위해 동성 제자와의 하룻밤을 불사한다. 하지만 이 모든 선정적 장면에서조차 카메라는 건조한 관찰자의 시선을 고집하면서, 학자 킨제이의 ‘학문적 열정’에 집중하는 일관성을 보인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올랜도 블룸의 아버지로 중후장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리암 니슨은, 어린 시절 곱사병에 걸려 척추가 휘었던 킨제이를 연기하기 위해 촬영 기간 내내 허리를 30도 정도 구부리고 있었다고 한다. 관객은 이 중년배우의 육체적·정신적 몰입이 창조해낸 킨제이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스크린에서 선정적 아드레날린을 찾기는 힘들겠지만, 편견과 오해에서 해방된 인간 킨제이를 만날 기회다.
킨제이는 혹벌 학자?
어수웅기자
앨프리드 킨제이(1894~1956)가 하버드에서 받은 박사 학위는 분류학이었다. 그는 처음 20년 동안 수백만 마리가 넘는 혹벌을 모았고, 혹벌 수백만 마리가 개체마다 모두 다른 특징을 가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리고 성생활은? 무려 1만2000명을 인터뷰했고, 그 결과를 두 권의 책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1948),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1953)으로 묶어냈다. ‘킨제이 보고서’로 알려진 이 두 권의 책은 개인의 침대 밑에 숨겨져 있던 성생활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면서, 보수적인 미국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상당수 남성이 동성애와 이성애의 경계를 오가고 있고, 혼전과 혼외정사의 경험을 가진 여성이 많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킨제이의 연구는 센세이셔널리즘이 아니라 ‘과학’이었고, 인간의 성행동을 ‘정상’과 ‘비정상’이 아니라 ‘보편적이다’와 ‘드물다’로 분류해야 한다는 당위를 낳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미국인들은 ‘플레이보이’보다 ‘킨제이’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으며, 록펠러재단은 연구비 지원을 끊었다. 그는 예순둘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반세기가 흘러 이제는 점점 잊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