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먹다가 / 박지영

 

신문 위에 라면 냄비를 올려놓는다
젓가락으로 들어올린 면발 아래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신이 보이고
죽 그들의 이름 나열되어 있다
지하철 화재 참사 사진이다
급히 입 속으로 밀어 넣던 라면
뱉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다
시장기를 어쩌지 못해 삼키고 만다
몇 가락 더 끼적거리다 얼결에 젓가락 놓쳐
면발과 국물이 신문에 떨어진다
하필 이름 써있는 곳에 국물 떨어져
이름들이 주글주글 부풀어오른다
퉁퉁 불어 냄비 가득한 라면은
소머리 국밥에 허옇게 뜬 골수 같다
불어터진 라면 한 가락
죽은 사람 이름 위에 척 달라붙어 있다
그것이 굼틀 하는 것이다

 

현대시학, 2004, 8월호

 

 

 

 

 

냄비 / 김응교

냄비는 삿포로 라면을 끓여낸다
냄비는 동원 참치국을 끓여낸다
냄비는 오뚜기 옥수수 스프를 끓여낸다
냄비는 파 마늘 햄 미역 깨소금 담고 미역국 끓여낸다
냄비는 모든 것을 담고 모든 것을 끓여낸다

냄비는 늘 싱싱한 생선을 주는 깊은 바다 같다
냄비는 헉헉헉 뜨건 숨 뿜으면서도
냄비는 수명 다할 때까지
냄비는 군소리 없다


 

 


 

 

라면을 끓이다 / 이재무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 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린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새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 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칼을 집는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세상을 나누기 위해 나타난 자인 것이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올는지 모른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닌 것이다

 

제19회 「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시집 - 푸른 고집 (2004년 천년의시작)

 

 

 

 

 

거룩한 식사 /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점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출처:한 스푼의 명상

 

사진 출처/ 네이버 포토 갤러리 편집/ 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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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2005-04-27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재무의 '라면을 끓이다'라는 시가 제일 맘에 드네요 먹고 시포라 아흑 (ㅜ_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