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24명 ‘금요일의 문학이야기’
입력 : 2005.01.28 17:28 57' / 수정 : 2005.01.28 17:53 04'
“시골에 가면 예전에 밤길에 산을 가다가 중간에 사람을 마주치면, 많이 지나온 사람이 앞으로 갈 길이 많은 사람에게 ‘금방 사람이 지나갔는데, 빨리 쫓아가 보시오’라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무서운 밤길 가는 사람에 대한 위로입니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어둠에 두려움을 갖고 갈 때 그 한마디 거짓말이 앞으로 어둠 속을 갈 후행자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소설입니다.”
소설가 이청준에게 소설은 타인을 위로하는 거짓말이다. 그는 소설의 공동체적 기능을 중시한다. 같은 자리에 있던 동향(전남 장흥)의 후배 작가 이승우의 소설론은 자아지향적이다. “작가는 여러 편의 소설을 통해서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라거나 “실제 많은 일화들이 허구입니다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인물의 의식,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적어도 제 기억이 보증하는 한에 있어서 제 젊은 시절 마음속에 있었던 욕망과 자의식들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화영 고려대 교수가 진행했던 문예진흥원 ‘금요일의 문학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이다. 오늘의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 24명이 털어놓은 문학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김 교수는 매번 한 쌍의 문인들을 불러놓고 마치 노련한 수로(水路) 안내인이 배를 이끌듯, 초대 문인들의 입을 열게 해서 문학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정담(鼎談)을 빚어냈다. “대화는 가급적 평론가들의 영역인 작품 해석이나 평가와 같은 엄숙한 내용을 피하고 그 작품을 쓰게 된 동기, 집필 과정, 거기에 따른 어려움과 에피소드 등 주로 작품의 사생활에 치중하도록 했다”라는 것이 진행자의 의도였다.
“내가 동료 문인보다 쓰는 양이 좀 많아서 다작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는데”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던 시인 고은은 “나는 내가 쓴 시를 외우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외우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한 줄입니다. ‘절하고 싶다 저녁 연기 자욱한 저 건너 마을’이라는 시인데…”라고 털어놓았다. 그와 마주 앉았던 시인은 최근 타계한 김춘수. “너무 많이 써서 미안합니다. 9월 한 달에 스무 편 썼습니다”라며 팔순 이후에도 왕성했던 시심(詩心)을 쑥스러워하면서 과시했다.
소설가들은 창작 밀실의 풍경도 스스럼없이 공개했다. “그러니까 대개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생각을 하고 생각이 다 이루어지면 그곳에 멈춰서 메모를 해두든지 써두든지 하게 되었다”고 성석제는 밝혔다. 그런가 하면 심상대는 작품 제목을 먼저 정한 뒤 “주인공의 직업과 사건이 진행되는 계절만 정해지면 됩니다”라고 창작 기법의 비결을 공개했다. 신경숙은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작품을 쓰려고 하기 전까지의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는 것 같아요. 책상은 저기에 두고, 책상 앞에 갈 때까지 가능하면 안 가볼까 하는…”이라며 말끝을 흐렸고, 이혜경은 “거의 비슷한 경우인데, 책상 앞으로 가는 게 겁나서 책상 앞으로 안 갈 수 있는 핑계만 있다면 그게 뭐든지 간에, 책상 앞으로 안 가려고 남의 일도 많이 거들어 줍니다”라며 진저리를 쳤다.
창작의 영감을 얻는 방법의 경우, 소설가 윤대녕은 여행을 다니면서 절에 한 달 정도 묵으면 한 편을 탈고하는데, 나중에 소설에 그 장소를 감추지 못한다. 하성란은 집에서 주로 글을 쓰는데, “주위 환경이나 저의 경험보다는 오히려 선후배나 동료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받게 되거든요”라며 작가치고는 드물게 남의 소설을 열심히 읽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책에는 또 소설가 한승원 박범신 이문열 김원우 송하춘 윤후명 김영하 조경란, 시인 황지우, 평론가 김주연 장영희씨의 문학적 육성도 들어 있다. 당대의 문학 독자들에게는 문학의 ‘사적(私的) 흔적’을 보여주고, 후대의 한국 문학 연구자들에게는 귀중한 문학사료로 활용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