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콤달콤 오렌지 향에 숨겨진 인간의 상실감
송은경 옮김 | 문학동네
▲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토속요리, 원예 등에 해박한 조안 해리스는 전원을 배경으로 하는 향기롭고오감을 자극하는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 |
어린 시절의 원초적이고 포근한 기억들은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에 녹아 있는 경우가 많다. 입맛을 다시게 하는 아득한 향기는 그 음식과 연관된 사람들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기에서 유년기를 보낸 한 프랑스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어머니와 오빠, 언니에 대한 소녀의 내밀한 기억과 인생 역정이 음식 이야기와 함께 펼쳐진다.
조안 해리스는 몇 년 전 개봉된 영화 ‘초콜릿’의 원작자로, ‘오렌지 다섯 조각’ ‘블랙베리 와인’ ‘프랑스풍 주방’ 등 오감을 자극하는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요리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이 소설은 특히 프랑스 전원마을에서 성장한 작가의 토속 음식과 원예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감칠맛 나는 묘사가 돋보인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시골 마을 레 라뷔즈에서 나고 자랐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 때문에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나이 든 과부 프랑수아즈 시몽(본명 프랑부아즈 다르티장). 그녀가 자신의 본명을 숨기면서까지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과거는 그녀가 아홉 살 때, 독일군 점령 당시 일어난 한 살인 사건이었다.
예쁘지도 않고 귀염성도 없지만 물러설 줄 모르는 고집을 지녔던 소녀 프랑스와즈는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와 부딪친다. 자녀들의 이름에 모두 과일 이름을 붙여 부를 정도로 과일을 사랑했던 어머니는 요리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괴팍한 성격의 그녀는 자신의 기질을 가장 많이 물려 받은 주인공인 막내딸을 마음 깊이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여자다운 맏딸 레네트를 더 사랑하는 듯이 보인다. 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고 싶은 막내딸은 어머니에 대한 애증(愛憎)으로 사사건건 대립한다.
조용하던 시골 마을에 독일 점령군이 찾아오면서 주인공인 어린 소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군 신분이었지만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 그 병사에게 어린 소녀는 무지갯빛 환상을 품는다. 오빠와 언니도 마을 사람들의 사소한 비밀을 그 병사에게 고자질하고 립스틱이나 담배 등을 얻어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병사가 살해당하자 독일군은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다. 부역자로 몰린 주인공 가족은 마을 사람들에게 폭행당하고 집이 불타는 소동을 겪으면서 쫓기듯 마을을 떠난다.
그 병사를 죽인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제는 나이가 먹어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형벌처럼 내려진 그 비밀을 혼자 짊어진다.
소설 중간중간 프랑스 토속 요리 조리법과 요리맛에 대한 관능적인 묘사는 소설 읽는 맛을 더해준다. 나이 탓에 쪼그라진 노인을 마치 만들다 실패한 수플레(계란 흰자에 우유를 섞어 거품을 낸 다음 구운 요리)가 슬그머니 가라앉는 것 같다고 묘사한다. 울컥 감정이 복받치는 장면은 ‘찬란한 혜성 같은 흥분이 겨드랑이를 쿡쿡 찌르고 뱃속을 팬케이크 뒤집듯 홱홱 뒤집었다’(61쪽)라고 표현한다.
고향에서 식당을 연 주인공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요리는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다. 요리에 대해 애정을 쏟은 어머니지만, 유독 오렌지 향기만 맡으면 편두통을 앓는다. 그 오렌지에 얽힌 비밀스런 애증과 관능을 푸는 열쇠는 어머니가 죽으면서 물려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요리책에 담겨 있었다. 입 안에서 터지는 새콤달콤한 오렌지 향기 속에는 어둡게 얽혀든 상실과 원한 같은 인간의 어두운 면이 숨겨져 있었다.
성장소설로도 읽히는 이 작품은 미스터리 같은 인생의 진실에 접근하는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해 사랑과 미움, 양심과 배신 등이 얽힌 삶의 이중성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