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의 의미

 

우리는 ‘보는 것’ 통해 사물을 새롭게 알기도 하지만

          ‘아는 것’ 통해 사물을 새롭게 보기도 한다.

 


어린이는 말을 하기 이전에 이미 보는 것으로써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아차린다. 이런 면에서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말보다 보는 것이 훨씬 앞선다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들이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을 설명하는데 직접적으로 보는 것 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말로 설명한들 그것의 모두를 완전하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말을 하는 데 항시 손짓이나 몸짓 심지어 표정까지 동원되는 것도 알고 보면 보는 것의 필요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공중전화 박스나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라.

 

분명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데도 많은 몸짓과 표정을 혼자서 만들고 있지 아니한가. 이렇듯 보는 것은 우리들에게 눈이 있는 이상 필수불가결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린이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느냐, 자기가 아는 것만 그리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껏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아무튼 우리는 ‘보는 것’을 통해 사물을 지각하기도 하고 ‘아는 것’을 통해 사물을 보기도 한다.

 

 


그림은 미국의 현대화가 재스퍼 존스(J. Johns)가 만든 석고 위에 금속물을 입힌 벽돌만한 크기의 조각 작품으로, 제명은 <비평가는 본다>이다.

 

- 이 작품은 현재의 우리들에게 보는 것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반추하게 하는 흥미 있는 작품이다.

 

얼핏 보아 안경 속의 형체가 눈 모양 같지만 사실은 치아가 드러나 보이는 벌린 입술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안경하면 곧잘 눈만을 연상하는 우리의 타성을 담담하게 희롱한 듯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이 작품은 그 이상의 익살을 암시하고 있다.

 

우선 <비평가는 본다>는 제명에 의존해서 유추한다면, 보는 것을 문제 삼는 비평가는 '눈으로 보지 않고 입으로 본다'는 의미도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미로 비평가는 '눈(안경)으로 본 것을 말한다(입술)' 고도 할 수 있다.

 

우리들이 보는 것은 반드시 눈으로만 끝나는 것일까.

 

갓난아기는 보이는 물건이면 일단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그것으로 부족하면 입에 가져간다. 보는 것을 보다 분명히 느끼기 위해 만지작거리고 그것도 모자라면 입에 가져가서 씹어 보기까지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다시 보면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입까지 간다는 비유적인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보는 것은 시각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손과 입술의 촉각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린이가 모든 사물을 입으로 가져가게 되는 것을 멈추게 되는 것은 자라면서 이러한 사물에 갖가지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이다.

 

사물이 지니는 개념을 이름으로 알고 난 뒤부터 어린이는 입에 가져 갈 것과 그냥 두고 보는 것을 이름만으로 구별해낸다.

 

이러한 사실은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단순히 눈으로 본 것(감각)만을 그리느냐, 아는 것(개념)을 첨가해서 그리느냐 하는 문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제명과 상관없이 이 작품을 하나의 사물을 보듯 유심히 본다면, 안경은 물론 입술, 치아까지 실제의 모양과는 똑같지 않은 유사하기만 한 애매모호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우뚝 솟은 코모양도 없이 면면한 평면에 약간 두툼하게 박힌 둥근 안경테가 오직 구멍 뚫린 공간을 만들어 안경테 속에 갇힌 입술모양 같은 입체적 형상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

 

 

 

눈덩이 같기도 한 입술, 입술 같기도 한 눈덩이,

눈동자 같기도 한 치아, 치아 같기도 한 눈동자,

눈을 뜬 것 같기도 감은 것 같기도 한,

입술을 벌린 것 같기도 다문 것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현상은

보는 것 같기도 말하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느낌을 준다.

 

본 것을 애매하게 말하고 있는지

말한 것을 애매하게 보고 있는지,

마치 '보는 것'(시각)이 '말하는 것'을 앞서고 있는지,

'말하는 것'(언어)이 '보는 것'을 앞서고 있는지,

 

아니면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이 상호보완하고 있는지 ― 이 작품은 이토록 감상자로 하여금 곤경한 처지로 몰아넣는다.

 

정물을 조각화한 것인지 조각적인 정물을 그린 것인지 그림의 영역조차 모호한 이 작품에 재스퍼 존스 자신은 실물 그대로만 보길 원할 뿐이라는 담담한 말만 남기고 있다.

 

그는 관념에 결부되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하찮은 대상(안경, 입술)을 생경한 모양으로 이렇듯 끝없는 수수께끼를 만들어 우리의 잠자는 시선을 예리하게 일깨우고 있다.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일상적인 평범한 낡은 언어조각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꿰매는 방법이 특이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살아 있는 언어로 동시에 많은 의미를 던져두지 않는가.

 

이런 의미에서 보면 화가는 보는 것에 대한 관심을 그림으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라 달리 말할 수도 있다.

 

화가들은 보는 것을 위해 갖가지 모양을 그리거나 만들어내지만 거기에 대한 화가나 보는 사람의 주된 관심은 역사적으로 보아 시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우리들이 만약 하나의 작품을 앞에 두고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시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인 이러한 보는 것에 관한 갖가지 관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술사(美術史)상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남부 프랑스의 동굴벽화에 나타난 동물그림은 동굴 깊숙한 곳에 모두가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그려졌는데, 암벽 위에 그려진 동물그림은 대개 중첩되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수렵을 일삼던 당시의 원시인들이 풍요로운 동물의 수확을 기원하는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관심에서 그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암벽 위에 그려진 동물은 하나의 수확을 뜻함과 동시에, 창살이 꽂힌 듯 그려진 동물은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그 위에 또 다른 살아 있는 동물을 겹쳐서 그리는 일이 많았었다.

 

그런가 하면 중세기 성당의 창문이나 벽면에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나 모자이크의 그림들은 하느님의 절대적 위엄이나 말씀을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한 관심에서 그려졌기 때문에 성경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그림이 압도적이다.

 

이러한 그림에는 원근과 명암이 없이 간단명료하게 도상(圖上)적으로 그린 것이 특징인데, 성경을 모르는 신자에게는 계몽적인 의미도 깃들여 있다.

 

이에 반해서 통치자 개인의 명예나 업적을 중시했던 로마시대에는 개선문이나 기념탑에다 업적의 내용을 그림으로 새기길 즐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까지 후손들에게 길이 남기길 원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부조나 조각 작품은 기록화나 초상화의 성격을 지닌 사실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화가가 이렇듯 특정한 집단의 도구적 관심에다 초점을 맞춰 그림을 그릴 때, 그 그림은 자연히 교화적. 기록적 경향의 설화성이 앞서게 되며, 관람자 또한 그림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다.

 

이러한 화가의 도구적 관심과는 달리 그림을 현실의 이상화 내지 거울과 같은 반영의 관심으로 간주한 시대가 있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인체를 그리거나 조각하되 가능한 비례와 균형을 조화 있게 추구하려는 이상적인 아름다움(美)에 주된 관심을 보였다.

 

인체가 어떠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화가들은 머리부분이 전신의 7등분 혹은 8등분되는 게 이상적이라는 캐논(법칙)을 만들기까지 했다.

 

가로, 세로의 이상적인 비율을 측정한 신비의 황금분할도 이 시대에 나온 것으로 건축은 물론 그림의 구도에도 이러한 법칙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불려지고 있는 작품 <밀로의 비너스>도 이때 것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모작인 대리석의 이 작품을 보면, 지나치게 움푹 들어간 눈이라든지 수직으로 내려선 콧날, 너무나 둥근 가슴 등은 실제 여체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당시 그리스인이 생각한 사랑과 미의 여신을 표상하는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그리스 시대의 아름다움이 시대를 불문하고 불변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태껏 논란이 많으나,

 

오늘날 우리들이 무의식중에 그림에서 찾으려드는 아름답다는 관념은 사실상 이 시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그림에 있어 필수적이고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직도 우리들 주위에 많은 게 사실이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러한 이상화된 현실의 반영을 보다 과학적으로 객관화시켜 보려고 애를 썼다.

 

그 결과 인체의 해부학적 탐구는 물론 인체에 국한되었던 묘사의 대상을 그 배경이 되는 풍경에까지 확대하여 삼차원의 자연공간에 놓여진 여러 인물들을 이차원의 평면인 화폭에다 묘사하는 방법까지 창안하게 되었다.

 

이른바 오늘날까지 풍경화를 그리는 데 있어 요체가 되어 왔던 소실점에 의한 명암과 원근법의 표현이 바로 이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의 만능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스케치북에 해부도(解剖圖)를 능가하는 인체 여러 부분의 구조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려 놓고 있었다.

 

 

  

 

그가 수도원의 식당 벽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투시도법식의 원근법을 철저하게 적용한 대표적인 그림의 하나로 미술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 있었던 현실의 이상화 내지 재현(再現)적 표현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그것을 그리는 캐논이나 투시도법 같은 합리적인 묘법(描法)의 규범만 앞세우게 되어, 실제로 작품에 표현된 것은 우리가 흔히 보는 현실의 적나라한 반영이 못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그림은 고귀하거나 우아하게, 장엄하거나 숭고하게 다루어져 그리는 대상도 자연히 제한되기 마련이었다.

 

더욱이 당시 대부분의 그림이 왕실 측근 내지 재력 있는 가문의 주문이나 후원에 응해서 그려진 것이 많아서, 엄밀히 말해서 화가의 역할과 관심은 이러한 후원자의 취향에 맞는 주제에 솜씨만 제공한 듯한 소극적인 한계에 머물러 있었다.

 

현실에서 생생하게 닮은 것을 만들어내려는 화가들 자신의 기술과 주제가 보다 자유롭게 그리는 화가 자신들에 의해 주장되기 시작한 것은 서민의식이 점차 부상되기 시작한 19세기 산업혁명 이후부터이다.

 

“보이는 것만 그리자”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Courbet)의 이러한 선언은 '천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특정한 부류의 취향에만 통용되던 한정된 주제의 해방이자,

현실의 대상을 무턱대고 미화시키려 드는 관념에 대한 해방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쿠르베>

 

  <쿠르베>

 

  <쿠르베>

 

  <쿠르베>

 

식탁 위에 무심히 놓여 있는 주전자도, 낡고 헤어진 농부의 신발도, 매부리코를 가진 주름진 노파의 프로필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외면되어 오던 가난의 참상도, 그것이 보이는 것인 한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쿠르베의 주장은, 평범한 그대로 현실의 추함도 그릴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러한 것의 선택도 바로 화가 자신의 눈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새롭게 깨닫게 한 것이었다.

    

 

보이는 것만 그리되 그 중에 어떤 것을 그릴 것인가.

이런 것에서 비로소 화가 자신을 향한 독자적인 물음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림을 도구적 관심, 현실의 반영으로 본 화가의 소극적인 관점에서 벗어난 화가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데는 화가의 솜씨만 필요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해서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은 화가의 마음이자 생각이다.

 

화가의 솜씨보다 화가의 마음과 생각이 중요시되자 이제껏 팔짱만 끼고 화가의 솜씨만 지켜보던 관람객도 다소 어리둥절한 눈으로 화가의 생각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것은 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의문이다.

 

이제껏 우리는 너무 눈만 비대하여 단순히 보이는 것만 본다고 믿고 있지 않았던가.

 

보는 것을 다시 보는 것 - 이러한 시점에서 화가는 아래와 같은 관람객의 투정을 듣게 된다.

 

- 도대체 이런 것을 그리다니, 아무리 화가가 보이는 것은 다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도 그릴 수 있는 것인가.

 

현대미술에 있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보는 것에 대한 관심의 전환은 관람객의 이러한 투정에서 시작된다.

 

이것이야말로 그림을 보는 관심의 흔들림을 자각하는, 또 앞으로의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희망적인 징후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 재스퍼 존스 그림 모음 -

 

 

 

 

    

 

출처: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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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stella.K 2004-10-2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고마워요.^^

브리즈 2004-10-30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르베의 가장 사실주의적인 작품은 "세상의 기원"이란 작품이지요. 오르셰 미술관에서 보았던 때가 기억이 나네요. 쿠르베에 대한 상식을 제법 깨주기도 할 뿐더러 숙연해지기도 했답니다.

stella.K 2004-10-3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오르셰 미술관 정말 다녀오셨어요? 참, 브리즈님은 알면 알수록 놀라우세요. 미술에 조예도 깊으시고...근데 미스테리맨이라는 거. 물론 알라딘 내에서 미스테리맨이 어디 한 둘 이어야 말이죠. 흐흐.

니르바나 2004-10-3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요.
최후의 만찬이 식당벽에 그려진 벽화군요.
이 페이퍼를 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