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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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수필을 많이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토록이나 산문을 무게있고 진지하게 쓰는 작가는 처음 보겠다. 물론 이만하거나 이보다 더 진지한 산문을 찾아보면 많겠지만, 그동안 내가 읽은 것은 하나 같이 일상을 소재로한 편안하고 담백한 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제목 또한 시의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 처음 볼 때부터 끌렸다.

 

우리가 알다시피 저자 유하의 프로필은 시인에서부터 출발한다. 시에서 출발해서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는 시를 쓰다가 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런 그가 산문도 썼다니 조금은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를 아는 개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까지 나는 그를 영화로만 안다고 생각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꽤 잘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이미지가 나에게는 긍정적으로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모를 열등감 또는 뭔가의 열망 같은 것이 느껴졌고, 때론 뭔가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문제는 그 '뭔가'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뿐. 그런데 이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장르를 왔다갔다 할 수도 있겠지만, 시를 썼다 영화감독을 하는 그는 이제 다시는 시는 안 쓸 모양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시를 사랑하며 시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오죽했으면 이책 어딘가에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면 어느새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고백했을까. 이쯤되면 난 아직 시에 대해선 문외한인데, 왜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시'에 대해 그토록 집착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시를 읽고 써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언문을 깨친 건 만화와 영화를 보면서부터다. 그것도 아주 집착적으로. 거기엔 TV로 빠질 수 없는 요소중의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세대는 이를테면 TV 중흥 1세대쯤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가 TV에 집착하게 된 때는 각 TV 방송국이 개국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고 그러니 얼마나 신기하게 여기며 TV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지금이야 TV 수상기가 집집마다 한 대도 모자라 방방이 있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가 TV를 보기 시작한 때는 집집마다는 고사하고 마을 사람들이 공동시청을 해야할 정도고, 집에 TV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집이 부자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때였다. 그러니 TV 프로 중 어느 프로가 중하고 재미있지 않은 프로가 있었겠는가. 채널도 몇 되지도 않았다. 더구나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저녁 6시부터 12시 정도였고, 아침 프로가 있다고 해도 그건 오전 10까지 밖에는 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TV 중흥 1 세대의 풍경은 바로 이랬다. 그 접점에 나 역시 포함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책은 나에게 분명 아련한 추억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1부 추억은 나의 힘'이란 쳅터는.

 

아,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

 

내가 정식으로 극장에 가서 영화는, 중학교를 막 올라와서 당시의 과외 선생님과 그학동들과 함께 본 <챔프>라는 영화였을 것이다. 권투 선수였던 아빠를 링에서 잃고 서럽게 울던 꼬마가 관객들을 울렸다. 나 또한 울었다. 영화의 힘은 바로 이런 거구나를 그때 처음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때 처음 본 페이다나 웨이의 퇴폐미는 또 어떠한가. 만화 같은 건 국민학교 졸업과 함께 졸업하고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시절엔 오드리 헵번의 영화가, 제임스 딘의 영화가 결코 고전 영화라고 볼 수 없던 때였다. 그때 TV에서 보여주는 영화는 꼭 밤늦은 시각에 했기 때문에 나같이 밤잠도 많고 아침잠도 많은 사람은 TV 영화 보는 것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10시에 하는 소위 주말의 명화도 12가 다 되거나 넘어서야 끝나는 것이기에 안방에 딱 한대 놓인 TV를 볼라치면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엄마는 일찌감치 잠에 골아 떨어지는 타입이었고, 아버지는 당신이 영화 보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라 딸의 영화 사랑을 눈감아 주신 적이 많았다. 하지만 가끔은 당신의 잠을 방해 받는다 생각되면 가차없이 뭐라고 하시기도 하셨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면 영낙없이 안방을 물러나와야겠지만, 엔딩이 얼마남지 않았다면 나 역시도 양보하지 않았다. "쫌만요. 쫌만 있으면 끝나요." 조금만 있으면 끝난다는 딸의 말에 아버지는 이내 당신의 고집을 꺾으셨다. 그래바야 금방 또 언제 그랬냐싶게 잠에 빠져드실 거면서 앙탈은. 그래서 보기 시작한 영화가 광 수준은 아니어도 대화에 못 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뭐든 오래 하지 못하는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오래지 않아 영화를 다시 가까이 끌어 들이게 했던 건 나의 꼰대(나의 글선생)를 만나고 나서다. 지금 생각하면 꼰대를 만난 것이 참 이상한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그를 만난 의도는 소설을 배우고자 함인데 정작 소설 보다는 영화를 알게되니 말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 중 꼰대를 만난 건 두 번이었는데 두번 다 그랬다(물론 나중에 두번째는 내 자의로 잡혀준 셈이긴 하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한 해 동안 무려 120편까지 본적도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땐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의 꼰대는 뭔가의 자력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드니까.   

 

나의 꼰대는 어찌보면 굉장히 자상하고 어찌보면 상당한 개인주의자 같기도 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1995년이었던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 한국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그의 모습은 제법 진지했다. 그동안 영화를 멀리한 탓이었을까? 생판 알지도 못했던 영화감독을 꼰대에게서 듣고 그날로 그는 우리를 그 영화감독의 세계로 인도했다. 나는 꼰대가 <중경삼림>을 알게해 줬다는 그 감격보다는, 그 옛날 나의 과외 선생님과 함께 <챔프>를 본 추억이 새삼 떠오르게 해줘서 좋았다. 뉘라서 성인인 제자와 함께 선뜻 영화를 보러 가자고 끈단 말인가. 그것은 그 옛날 과외선생님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보는 수준이 낮아서일까? 왕가위 감독은 스타일리시한 것은 있지만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내겐 그다지 감동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렇더라도 나는 꼰대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나의 옛 과외 선생님을 떠올리게 해줬으니까. 아니 그 배역을 친히 맡아줬다고나 해야할까? 그리고 그것을 아직도 못 잊어한다. 술에는 안주거리가 있어야 하듯, 인생이란 술엔 안주삼을만한 추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추억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강해지는데 그만큼 추억 또한 강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바에야 추억한들 무엇하겠는가. 추억뒤에 오는 생각은 그만큼 나이 먹었다는 것과 그때를 돌이킬 수 없다는 안타까움뿐. 잡을 수 없고, 뭔가를 두고 온 것 같은 찜찜함이 남는다. 요즘은 보는 것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과거를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은 것이어서 미래보다 새롭다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 같다. 더구나 앞으로의 미래가 장미빛일 거라고 장담하지 못할바엔 말이다. 하긴, 저자가 책 제목을 이렇게 정했을 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좋은 것만은 아니기에 차라리 과거가 나을 거라고 해서 그렇게 정한 것일까?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들은 과거 어느 시기에 비슷하게 경험한 것들의 재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서태지의 음악도 새로운 것 같지만, 샘플링적 요소, 즉 있는 것을 '재활용'한 측면이 강하다. 미래가 더 이상 새로운 신천지가 아니므로, 대중이나 문화 생산자들은 다시 '과거'로 향수 어린 시선을 보내게 된다. 결국 조로한 현실이, 조로한 대중이 과거로의 문화적 귀환, 즉 '노스텔지어 미학'을 낳는다.(245p)

 

난 그제야 작가가 제목을 왜 그렇게 썼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전원주에게도 내면연기를 허하라

 

책을 읽다보니 작가가 언젠가 영화 <붉은 수수밭>을 보고 쓴 글이 공감이 간다. 일종의 배우 얼굴론이라고나 할까?

 

우스운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붉은 수수밭>이나 <부용진> 같은 중국영화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배우들의 얼굴이었다. 그 속에 등장하는 얼굴들은,우리가 미의 기준으로 볼 때, 소위 '뜰 수 있는' 배우의 얼굴과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생김새를 하고 있다. ...... 다시 노자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 얼굴들은 '自然스럽게 짜짜로니'스러운, 또는 '스스로 그렇게' 생겨먹은 얼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들이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은, 그것의 생김새 속에 어디에도 오염되지 않은 중국적 오리지널리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지금 우리 배우들의 얼굴은 어떤가, ... 현재 활약하고 있는 우리 배우 대부분의 얼굴엔 포토제닉함이 부재하다. 얼굴 속에 관객의 눈동자를 붙잡아둘 수 있는 정령(精靈)이 살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령이 살지 않는 까닭에 배우로서의 생명도 그리 길지 않다. 어디선가 베낀 듯한 얼굴들이 반짝 떠올랐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간다. 베낀 얼굴이 더 잘 베낀 얼굴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 그 '미인병'적 사고가 우리 영화의 개성과 고유성을 많이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얼굴은, 국화빵 틀로 찍어낸 예쁜 인형 같은 얼굴이 아니라 그만의 미적 아우라가 존재하는 얼굴이다. (223~224p)     

 우리는 왜 그토록이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나이들어 늙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일종의 성숙이라면 성숙인데 그것을 역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역시 TV다. TV나 영화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이 없는 연예인들이 화면을 장악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권력이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워 한다. 하지만 시청자들 또는 관객들은 작품 보단 누가 성형을 얼마나 하고, 보톡스를 얼마나 맞았는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정작 작품에는 몰입을 할 수가 없다. 미는 주름 하나를 제거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거든,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일찌감치 은퇴하고 은둔해버린 프랑스의 어느 여배우처럼 해라. 차라리 그게 오히려 신비롭다(행복해 보이진 않지만). 

이책을 읽고 있을 무렵엔 공교롭게도 TV에선 영화배우 하지원과 탈랜트 전원주 씨가 나오고 있었다(물론 각자 다른 프로에서). 하지원은 여전사 같은 캐릭터와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 내가 좋아하는 배운데, 어느 인터뷰 프로그램에 나와 마구 깔깔대며 이야기 하는 모습이 의외로 참 과장되다 싶었다. 말하자면 나이들어 뵈는 것이 싫어서 자신은 30대지만 여전히 20대처럼 싱그럽게 봐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능력이긴 하겠지만 30대는 어때야 하는 지를 모르는 사람같아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30대는 이래야 한다고 정해 놓은 건 없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였다. 난 이 배우가 앞으로 10년 뒤에 어떤 모습일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또한 전원주 씨가 나왔는데, 나름 방송계에서는 입지전적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는데 그는 억척스럽고 수선맞은 캐릭터만 할뿐 내면 깊은 연기는 못해봐서 아쉽다고 해서 공감이 갔다. 과연 이 배우는 정말 그런 내면 깊은 연기를 하면 안되는 걸까?

작가의 지적이 온당하긴 하지만 그 배후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방송의 권력구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카메라에 온전히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퇴출시켜 버리는 그 생리구조부터 이제 좀 바뀌었으면 한다.

작가의 지적에 공감하며, 언젠가 영화 <색,계>를 보면서 거기에 탕웨이가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고 나와 약간 놀란 적이 생각났다. 그게 우리나라의 관점에선 놀랄 일이지만 중국은 리얼리티를 강조해서인지 그렇게 인공적인 것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 뭐 하나라도 허투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그런 점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선 겨드랑이털은 고작해야 개그의 소재 밖에 더 쓰는가? 

 

난 그런 점에서 자신의 얼굴의 주름을 솔직하게 보이고 나오는 배우들이 언제부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면 처음엔 깜짝 놀라게 된다. 오, 당신도 늙는구료! 남의 일 같지가 않아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내 편안해지고 친근감마저 느낀다. 관객과 함께 나이들고 늙어가는 배우가 진정한 배우 아닐까? 늙음을 거부하는 배우는 예전에 자신을 좋아해줬던 펜들과 함께 늙을 수 없는 배우다. 그렇다고 그들이 젊은 관객에게도 어필하지 못한다. 지금은 늙지 않았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팬들을 잃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왕좌왕하다가 가장 빨리 도태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영상시대에 활자언어는 가능할까

 

좀 우문이긴 하겠는데 나는 얼마 전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대본집을 읽으면서 과연 내가 대본집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녀의 작품은 얼마 전 종편 TV에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책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책으로 읽어야만 할 당위성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책으로 읽기보단 영상으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것에 대해 저자는 영상언어와 활자언어를 굳이 나눌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호모비디오쿠스'란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대중은 단순히 소설 읽기의 부지런함보다는 TV 드라마 보기를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미리부터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못 밖는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를 버리기 전엔 영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자언어 즉 시나리오 없이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영상언어의 홀로서기에 대해 회의한다. 존 포드 감독은 좋은 시나리오가 없다면 차라리 농사나 짓겠다고 했지만, 나 역시 모든 영상은 활자의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믿고 있다. 

 영상언어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있는 자라면, 적어도 '문학의 위기'를 '문학의 열등감'으로 바꿔 부르진 않을 것이다.(213p)      

 그의 말을 읽으니 비로소 내가 노희경의 대본집을 읽은 당위성이 확보된 느낌이다. 그런데 이건 또 생산자라면 그 말이 유효하지만 여전히 소비자의 입장이라면 해당사항은 없어보이지 않을까? 마침 지난 주 토요일 토크쇼 <두드림>에 개그맨 홍록기가 나왔는데 그는 고백인지 자랑인지, 자기는 지금까지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 요즘 뭔가를 끄적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지 않는대신 TV는 엄청 본다나. 확실히 자랑 같이 보이기는 했다. 그렇다면 책 열심히 보고 영화 만들고 드라마 만드는 사람은 뭐란 말인가. 이건 완전히 날로 먹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그러자 옆에 있던 송승환이 그건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듯 이제부턴 책을 좀 읽으라고 일침 같은 조언을 한다. 그런데 좀 더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책을 읽지 않는 그도 활자로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저자의 말을 옳긴하다. 단지 생산자와 소비자의 묘한 권력구조를 안다면 영상의 소비자들도 영상의 생산자를 알아야 하고 그렇다면 활자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편한 것만을 추구하면 결국 도태되는 종이 아닌가. 영상언어는 세련되고 활자언어는 구태의연 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맺는 말

 

저자가 영화감독이라고 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재즈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은 듯하여 과연 하루키만 재즈를 좋아했던 건 아니란 생각을 했다. 모르긴 해도 재즈에 대해서는 하루키만 하던가 아니면 그를 능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시 지명도가 주는 아우라는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나는 저자가 대중에게 알려지기는 영화감독이라고 해도 이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자신의 직함에 대중문화 평론가란 수식을 하나 더 달아도 좋지 않을까 싶게 글발이 깊다. 영화나 대중문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책은 한번 읽어줄만 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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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0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4-1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꼰대'라는 말을 제가 어릴 때
'아버지'를 뜻하는 말로 통하는 속어였어요^^

우리 꼰대가...이러구..
야, 니네 꼰대, 저러구...했죠^^

한마디로 꼬장꼬장한 어르신을 빗대는 지칭어였던 기억이 가물거려서
사실은 친근한 말이랍니다. 정감도 듬뿍 배어있는 그런 말이지요^^

스텔라님께서는 2번이나 평가단에서 활동을 하셨군요.
역쉬...스텔라님의 글발을 알아주었군요^^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나름 장점도 있다는 말씀...

조언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언을 듣고도 고민이 되지만...
마감일까지 고민을 좀 더 해보고^^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stella.K 2012-04-10 15:05   좋아요 0 | URL
생각 있으시면 고민하지 마시고 편하게 도전하세요.
어차피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ㅎ
되면 열심히 하면 되는 거구요.^^

그리고 저의 꼰대 꼬장꼬장해요.ㅋㅋ

차트랑 2012-04-10 20:57   좋아요 0 | URL
에잇~!
좋습니다. 스텔라님 쿨~한 말씀에
지원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실 떨어질까 걱정도 되고...
(주저하는 주된 요인)
원치도 않는 책을 읽느라 시간을 소비할까 걱정도 되고...
읽어야 할 책이 10권 이상 기다리고 있는 형편 ㅠ.ㅠ
사실 독서를 적게하는 편이 아닌데 ㅠ.ㅠ

고맙습니다 스텔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