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요?

 

고등학교 시절 저는 집에서 한국일보를 받아봤습니다.

 

그 때 한국일보의 문학담당 기자는 김훈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문청이 그랬듯

 

저도 그의 문학기사와 문학기행의 팬이었습니다.

 

문화부 기자를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처음 품은 것도 그 때였죠.

 

95년 신문사에 들어오면서 그 꿈은 현실이 됐고, 99년부터는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화담당 기자지만, 제 6년 간의 문화부 기자 생활 중 가장 오랜 기간은 문학 담당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그를 제대로 인터뷰 했던 건 2001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런저런 인연을 그와 이어오고 있지만,

 

김훈 선배(신문사에서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선배라고 부릅니다^^)는

 

저에게 여전히 어렵고도 친근한 이율배반적인 존재입니다.

 

그 인터뷰 때 저에게 새겼젔던 말이 '6하를 배반한 글쓰기'였죠.

 

6하원칙을 생명으로 하는 신문기사와, 그 원칙 만으로는 품을 수 없는 삶의 진실.

 

그 사이에 갈등하고 고민하며 넘어서려는 욕망이 그의 기사에는 있었던 겁니다.

 

 

엊그제 토요일 밤, 다시 몇몇 문인들과 김훈 선배와 함께 술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은 선배는,  그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딸 사랑을 묻어내더군요.

 

그에 관한 이야기는 저와의 겹쳐진 인연 만큼이나 몇 번을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우선 그의 책 중 '밥벌이의 지겨움'에 관한 글입니다.

 

메트라이프 생명에서 얼마전 청탁을 받아 사외보에 실릴 글인데, 제 블로그에 먼저 띄워봅니다.

 

 

건조한 계절입니다. 편집국 제 책상에 꽂혀있는 책들을 훑어가다가 자극적인 제목에 시선이 멈춥니다. 김훈 세설(世說)이라는 부제가 붙은,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 나무 刊)입니다. 집집마다 청년실업자 한 명씩은 존재한다는 2004년의 한국에서, 감히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니요. 하지만 제목만 보고 역정을 내지는 마시기를. 그 안에는 당신의 울컥하는 감정이 오해였음을 증명할, 울림깊은 역설의 문장이 빼곡하니까요.

 

신문기자가 꿈꾸는 역설적 욕망이 있습니다. 6하를 배반한 글쓰기가 그것이죠. 사실 그렇잖습니까. 신문에 나오는 모든 기사는 6하를 원칙으로 하는 것이죠. 구태여 신문방송학 개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가에 대한 팩트(fact)가 어떤 사건을 알려주는 기본적인 정보라는 사실은 상식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객관성과 명료성을 생명으로 한다"라는 사실은 신문기사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이 고등학교때 읽었던 신문기사를 통해 해체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희 집에서는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었고, 그 신문의 문학담당 기자는 김훈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기사를 보면서 아, 신문기사를 이렇게도 쓸 수 있겠구나, 나도 신문사에 가서 문학담당기자를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처음 해 봤던 것이죠. 

 

그 욕망은 현실이 됐고, 신문사 문학담당기자가 되어 이 전직 기자를 취재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당연히 그 당시의 추억을 담아 질문을 던졌죠. 문학기자로서의 김훈은 6하원칙으로 구성되는 기사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젊은이가 어디서 누구를 찔러 숨지게 했다고 했을 때, 그 팩트의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은 도대체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죠. 가령 살인의 순간 그 젊은이의 영혼에서 끓어오르던 그 격렬한 분노를 어떻게 기사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진실은 오히려 그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것. 김훈은 6하를 버렸을 때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고, 그 때 기자생활은 오히려 풍요로웠다고 말했습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은 그의 산문집입니다. 6하를 버린 책이죠. 이제는 소설가로 더 이름났지만 그의 문장은 사실 산문에서 더 빛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요즘 세상에 대한 그의 호, 불호를 문학의 언어로 빚어낸 글들로 채워져있죠. 
어느 한 편을 들지 않으면 몰매를 맞을 듯한 요즘 세상. 하지만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판단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나는 도덕적 존재"라는 확신에 찬 사람을 김훈은 경멸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필시 누군가를 부도덕 하다고 생각하는 속내를 감추고 있기 마련"이라는 거죠. 그는 스스로를 도덕적 존재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부도덕한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처절한 제목의 이번 산문집에서 김훈의 글은 크게 네 뭉텅이로 나눕니다.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과 '늙은 기자의 노래', 그리고 '큰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거리에 관한 짧은 기록'이 그것입니다.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과 '큰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가 신문의 문화면에 어울리는 글들이라면, '늙은 기자의 노래'와 '거리에 관한 짧은 기록'은 사회면에 더 어울리는 글들이죠.
그동안 김훈에 관해 "삶에 관한 도저한 허무주의"라거나 "세상과의 불화"같은 수식어들이 도드라졌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선입관이 굳어져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짧은 글들로 묶인 이번 산문집에서는 갑년에 이른 장년이 자신 후배세대의 젊음을 부러워하며 그 싱싱함을 찬양한 글도 종종 눈에 띕니다.

분위기를 잠깐 바꿔, '노출'이라는 제목의 유쾌한 산문을 한 번 추천해보고 싶군요.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는 의미에서라도요.
"몸을 드러낸 여자들은 도시의 여름을 긴장시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산문은 바로 여자들의 여름 패션 중 '탱크탑'에 관한 예찬론입니다. "탱크탑에 핫팬츠로 강렬하게 몸매를 드러낸 여자가 저쪽에서 걸어올 때 더위에 늘어진 거리는 문득 성적인 활기를 회복한다"는 것이죠. 그 때 느끼는 순간적인 아득함은 온갖 정의로운 담론들이 아우성치는 이 황폐한 도시에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자의, 그나마의 즐거움이라는 겁니다.
사실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보다 이렇게 노출이 대담한 젊은 여성이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차라리 이 나라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고, 세상은 아직 기대할 것이 많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솔직한 것 아닐까요.
김훈이 보기에 탱크탑은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드러낸 패션이라는 겁니다. "드러내기와 감추기 사이에서 가장 긴장된 타협을 이끌어내는 패션이 탱크탑"이라는 거죠. "도발과 평화 사이를 밀고 당기면서 여름 여자들의 노출과 화장도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간다"는 문장이 독자를 설레게 합니다.
순간 순간 조각처럼 주어지는 시간들, 그의 문장과 함께 다가올 가을을 견뎌보시길.

어수웅의 영화 가로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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