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학번인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제 주변세대를 중심으로 '문청'에서 '영청'으로 무게중심이 바뀌지 않았는가 하구요.

 

그 때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또래들이라면 다들 '문학청년' 기질을 조금은 갖고 있었는데요,

 

제가 대학교에 입학할 즈음해서는 영화입문서를 함께 읽고 스터디하는게 유행하기 시작했었죠.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제가 가진 관심은 문학에 방점이 더 찍혀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아시다 시피,

 

요즘 한국영화가 우리 문화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토를 보면,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그런데, 다시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소설이 죽었다고 하는 시대,

 

그리고 소설이 주는 서사와 이야기는 영상 문화가 거의 완벽하게 대치했다고 하는 시대잖아요.

 

 

그렇다면 소설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결국 소설을 살아남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이죠.

 

너무 비장한가요?

 

 

쿤데라는 '불멸'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설을 쓸 만큼 미친 작가라면, 그리고 자신의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써야만 한다네."

 

 

무슨 말일까요.

 

회사에서 야근을 하다가 이번에 나온 문예계간지 '문학동네' 가을호를 읽었습니다.

 

서울대 박성창 교수의 '영화가 갈수 없었던, 그러나 문학이 가야만 하는 길에 대하여'라는

 

글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긴 글이었지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묘사'와 '에세이적 성찰'이 방법 중의 하나라는 거죠.

 

그리고 예로 든 작가들이 바로 김훈과 배수아였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훈의 소설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문체입니다.

 

가령 '현의 노래'에 나오는 이런 문장,

 

"비화의 날숨에서는 자두 냄새가 났다.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에, 비화의 입 속에서는 단감 냄새가 났고,

 

잠을 맞는 저녁에는 오이 냄새가 났다. 귀 밑 목덜미에는 잎파랑이 냄새가 났고, 도톰한 살로 접히는 겨드랑이에서는

 

삭은 젖 냄새가 났다. 비화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비린내가 났는데, 그 냄새는 초승에는 멀어서 희미했고,

 

상현에는 가까워지면서 맑았고, 보름에는 뚜렷하게 진했고, 그믐이 가까우면 다시 맑고 멀어졌다."

 

후각이 총동원된 이런 묘사는 영상서사의 묘사로는 포착되기 힘든 것이 아니냐는거죠.

 

배수아의 최근 소설도 마찬가집니다. 사건 위주의 내러티브를 진행하던 초기작과 달리

 

배수아의 최근 소설은 엄청나게 관념적이고 분석적이며 사색적인 분위기예요. 박교수의 표현대로 하면

 

'에세이적 성찰'이죠. 영화같은 영상서사가 표현하기에는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의 작품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나 '독학자'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죠.

 

 

문학기자를 거쳐 영화기자를 하고 있는 저로서는 그 생각의 단면들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영화가 지배하는 2004년 한국의 문화,

 

그만의 결을 갖춘, 그리고 영화가 도저히 베낄 수 없는

 

 소설 텍스트들이 더 풍성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문화소비자'로서 자신을 규정하고 싶은 독자와 관객들이

 

뿌듯하게 느낄 수 있는 문자텍스트와 이미지텍스트들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요.

 

출처:어수웅의 영화 가로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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