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조선일보 Books 서평위원

 


이제 곧 개강이라 수강생 명단을 받아 대충 훑는데 눈이 저절로 가서 멈추는 이름이 있었다. ‘문영희’라는 이름이었다. 학생들 사이에 ‘영희’가 아주 드물기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영희라는 이름이 너무 흔해서 적어도 한 반에 한두 명, 많으면 서너 명까지도 있었다. 그런데 ‘영희 세대’가 부모가 되어서는 절대로 자식들에게 영희라는 이름을 주지 않았는지, 요새는 오히려 아주 희귀한 이름이 되었다.

내 이름은 한자로 써도 아주 평범한, ‘꽃부리 영(英)’에 ‘계집 희(姬)’이다. 그런데 내 이름이 신문이나 잡지에 한자로 소개될 때는 온갖 독특한 ‘영’과 ‘희’자가 다 동원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희’로 嬉가 씌어졌고, 지난번 어느 일간지에는 禧라고 나왔다. 가톨릭 세례명도 있는데 그것도 내 세대에서는 제일 흔한 ‘마리아’이다. 내가 알기로 신약의 네 복음서에 나오는 마리아만 해도 일곱이나 되니(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사람으로 칠 때), 그 당시에도 아주 흔한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이름도, 한자도, 세례명도 모조리 다 흔한 것뿐이니 어렸을 적에 나는 걸핏하면 노트에 내가 개명을 하면 쓰게 될 독특하고 예쁜 이름이나 세례명의 목록을 적어 보곤 했다. 그런데 어영부영 살다 보니 개명을 못한 것은 물론, 그나마 정도 들고 포기하기도 해서 이름에 대한 관심이 많이 사라졌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독자가 내게 ‘오보(吾步)’라는 아호를 지어 보내 왔다. 한지에 정성스럽게 “吾步는 내 길을 가는 것이니 만고의 정도(正道)를 걷는 큰 길이요, 선친의 ‘보’(步)를 나 또한 가는 것이다”(돌아가신 아버지의 호가 우보〈又步〉였다)라고 뜻을 써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보 장영희’라고 하니 아주 그럴듯하고 멋있게 들리는 것 같다.

서양에는 아호라는 개념이 없지만 펜 네임, 또는 필명이 있다. 아마 가장 유명한 필명으로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일 것이다. 원래 이름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인데 청년 시절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증기선의 견습 파일럿을 할 때 강물의 깊이가 가장 알맞은 ‘두 길’이라고 외쳐 알리는 말을 필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일러스 마너’의 작가 조지 엘리엇은 남자 이름이지만 사실은 ‘메리 앤 에반스’라는 여자이다. 당시에 여류 작가들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남자 이름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쓴 ‘애담 비드’를 읽은 선배 작가 찰스 디킨스가 이 책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쓴 것 같다는 의혹을 제기해서 정체가 밝혀지게 되었다.

▲ 장영희
이 외에도 우리의 귀에 아주 익숙한 이름들이 작가들의 본명이 아닌 경우는 꽤 많다. ‘제인 에어’의 작가 샬럿 브론테의 본명은 커러 벨이고, 그녀의 동생이자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의 본명은 엘리스 벨이다. 단편 작가로 유명한 오 헨리의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은 원래 찰스 도지슨이다. ‘동물농장’과 ‘1984’를 쓴 조지 오웰 역시 필명이다. 본명은 에릭 블레어였는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영국의 수호신 성(聖) 조지에서 이름을, 집 가까이에 있는 오웰강 이름을 따서 성(姓)을 만들었다.

吾步 장영희-. 멋있기는 한데 익숙지 않아서일까,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하기 짝이 없다. 그냥 장영희가 좋다. 촌스럽고 분위기 없으면 어떤가, 부르기 좋고 친근감 주고, 무엇보다 장영희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말한다. “이름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은 그 어떤 이름으로라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을.” 맞다. 향기 없는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향기 없는 사람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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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9-0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분이 스텔라님이시군요! 사진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마태우스 2004-09-0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웃자고 쓴 겁니다. 저도 압니다!
그리고...오보라는 호는 별로 안좋군요. 기사가 픽사리난게 오보잖아요

stella.K 2004-09-0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 교수 제가 참 좋아하는 사람 중의 한분이죠. 근데 저분 아호 저도 맘에 안들어요.
저는 오늘 저녁 드디어 마태님 볼 수 있어요.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근데 제가 미인 사칭했잖아요. 그래서 웬만하면 토요일 번개에 나갈려고 했는데, 이 사칭죄에 걸릴까 봐 나가야할지 말야얄할지 고민 중이랍니다.
뭐, 이제 보니 제가 장영희 교수 정도의 인물은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예쁘게 봐주시렵니까? 그럼 나가 보는 쪽으로 적극 생각해 볼께요. ㅠ.ㅠ

▶◀소굼 2004-09-01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론테 자매의 본명이 따로 있었군요..오호

아영엄마 2004-09-02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본명을 모르는 저자의 이름들이 많이 눈에 띄네요. 제 이름도 상당히 독특한지라 유감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불러 줄 때 제대로 쓰는 사람 거의 못 봤습니다. 제가 써 주든가, 수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기다 조금 잘못 부르면.. 크흑.. (지랑->지렁??ㅜㅜ)

stella.K 2004-09-01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굼님/저도 그런 줄만 알았지 뭡니까...
아영엄마/지랑? 이름 예쁜 거 같은데 뭘요? 저는 너무 흔한 이름이 되어버려서 별로 사랑스럽진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