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이중액자를 깨고 삶과 문학의 허위를 벗겨라


삶은 허위다. 삶의 시종쯤 되는 문학은 삶보다 비천한 공갈이다. 그 허위를 찢어내는 데 가장 날카로운 손톱을 다듬어온 노통(Nothomb)은 추악한 문학 인생의 가면들을 공개적으로 지목하고 벗겨낸다. 목 조르는 쾌감, 목 졸리는 쾌감의 쌍곡선이 교묘하게 엉긴다.

이 소설은 83세 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대문호가 희귀병 때문에 죽음이 임박하자 하루에 한 명씩 기자들을 불러들여 인터뷰를 하는 내용이다. 처음 남자 기자 네 명은 인터뷰를 제대로 진행하지도 못한 채 지독한 멸시만 당하고 문호의 저택에서 쫓겨 나온다. 그러나 다섯 번째로 그 집에 들어간 여기자 니나는 모든 상황을 뒤집어 놓는다.

조실부모한 대문호는 어릴 때 외가 쪽에서 자라다가 17세 때 사랑에 빠진 15세 사촌누이를 그녀가 초경을 치르던 날 목졸라 죽인 과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범죄가 밝혀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을 의심하는 가족과 친척들을 전부 불태워 죽였었다.

이러한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여기자의 솜씨가 드디어 대문호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이끌어낸다.

조너선 드미의 영화 ‘양들의 침묵’을 겹쳐도 좋다. 소설에서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남성 살인범 프레텍스타 타슈, 그의 정체를 밝혀내는 여성 신출내기 니나의 구도가 영화에서 버팔로 빌과 클라리스 스털링의 관계를 능가한다.

기괴한 비장미, 소설을 읽다가 구토를 일으킬 것만 같은 역겨움이 연달아 이어진다. 두 사람을 겹겹의 둘레로 가두었다가 풀어내는 심리전조차 점층법적으로 뜨겁다.


▲ 아멜리 노통은 중독성이 가장 강한 소설을 쓰고 있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깃잘깃한 번역가의 솜씨도 놀랍다. 번역소설에서 ‘지청구’ ‘애면글면’ ‘씨억씨억’ 같은 단어들을 마주칠 때마다 마치 공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글을 읽는 느낌이다. 금년 상반기 한국어로 출간된 국내외 소설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글쓰기 할 때, 자위를 할 때, 다른 사람을 목졸라 죽일 때 당신은 손을 사용한다. 그때 당신 손은 쾌감을 느낀다. 그것도 관능적인 쾌감이다. 아무튼 작가는 음란해야 한다.”(21쪽)

봉준호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처럼 살인 미궁의 안개 속에 무람없이 잠기는 통증이 소설 전편을 적신다.

그런가 하면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식스센스’에서 꼬마 주인공(할리 조엘 오스먼트)이 말하듯 죽은 유령들에게 가장 끔찍한 일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데 있다는 환영이 검은 망토처럼 뒤덮인다.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살아 있는지, 당신이 행복한지 아닌지?”(188쪽)

이 소설의 진정한 맛은 고도의 풍자와 비꼬기에 있다. 선배 문인 레이몽 크노(1903∼76)와 루이 페르디낭 셀렌(1894∼1961)에게서 그리고 동시대인인 미셸 우엘르벡이나 프레데릭 베그브데에게서 맛본 문명 비평이다.

문단 뒤집기이기도 하다. “비위 거스르기라는 전대미문의 재능”(54쪽)을 유감없이 맛보려면 가장 제격인 소설이다.

주인공인 소설가가 쓰고 있던 속소설의 제목이 겉소설의 제목이 되는 테크닉은 ‘소설가 소설’이고, 시쳇말로 ‘액자 소설’을 닮았다. 엊그제 읽었던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이 좋은 예다.

소설 전부를 대화로만 끌고 가는 것은 노통의 ‘시간의 옷’에서 이미 그 정수를 맛보았다. 생사의 기로에 처한 소설문학의 우황청심환은 대화체밖에 없는가. 수십년 저쪽의 과거를 캐가면서, 그것도 살인의 추억을 들춰내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 간의 대화로만 이끌어가는 솜씨는 영락없이 산도르 마라이의 거작 ‘열정’에 빚지고 있다.

노통이 그것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뒤지지 않는다. 혹은 하일지의 고품격 세미 추리소설 ‘진술’을 떠올려도 좋다.

17세 때까지는 그리스 조각을 깎아 놓은 듯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던 대문호가 살인을 한 후 추악한 비곗덩어리로 변했으며, 그것을 시간의 굴레를 거꾸로 타면서 재연하는 대목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차용하고 있다.

올여름을 치가 떨리도록 재미있게 보내고 싶은 독자들께 권한다. 재독해도 좋을 것이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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