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c 민중들의 억눌린 삶 이탈리아 국민소설



▲ 소설가 알레산드로 마초니
알레산드로 만초니<사진>가 ‘약혼자들’을 출판한 것은 1840년이다.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한 계기는 1821년 피에몬테 지방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817년부터 밀라노에서 반(反)오스트리아 결사 조직에 참여하던 만초니는 민중들의 저항 동력을 피부로 느끼면서 이를 소설로 옮겨보기로 작정한다.

소설의 무대는 만초니가 살던 당대보다 2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17세기 이탈리아다. 당시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외세의 지배 곁에 얼쩡거리는 영주들, 그에 결탁한 귀족과 성직자 따위의 지배층들, 그리고 페스트가 당시 이탈리아 민중의 삶을 누르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의 철저한 고증 위에서 그 역사를 살았으리라 여겨지는 평범한 민중을 상상력으로 재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설의 기본 구도는 만초니가 살던 19세기 전반의 이탈리아로 고스란히 적용된다. 거의 유일한 변화라면 스페인 대신에 오스트리아가 들어선 것이었다.

19세기 전반 이탈리아의 분위기는 낭만주의로 얘기할 수 있다. 이탈리아 낭만주의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한 뚜렷한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실천한 문학운동이었다. 그것은 지식인뿐만 아니라 민중에게 현실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고 국가의 통일과 독립, 민중의 해방이라는 꿈을 실현하려는 국가사업에 그들을 참여하게 만들었다.

만초니는 ‘약혼자들’에서 평범한 시골 총각과 처녀를 중심으로 이런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전망을 펼쳐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렌초와 루치아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지만, 루치아를 좋아하는 지방 영주가 방해하는 바람에 도피를 하게 되고 서로 헤어져 온갖 모험을 겪은 끝에 마침내 다시 만나 행복한 결합을 이룬다. 평범한 설정이지만 곳곳에서 다양하게 얽힌 에피소드들과 치밀한 상황 설정, 그리고 감칠맛 나는 묘사로 소설 읽기의 최고의 재미를 준다. ‘약혼자들’이 당대 이탈리아에서 이른바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것은 바로 그렇게 시대적인 흐름을 민중의 구체적 모습과 언어로 생생하게 재현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민중 독자들로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첫 경험이었다. 이탈리아문학사에서 민중을 이만큼 근대적 감각으로 재현한 소설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약혼자들’의 가치는 역사를 다루는 만초니의 문학적 천재성에 있다. 루카치는 만초니를 인물의 성격 창조, 묘사의 다양성과 깊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로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는 역사소설의 대가였던 월터 스콧을 뛰어넘는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스콧은 문학보다는 역사에 중심을 두면서 주인공들의 기본 구도는 역사로, 세부적인 것들은 상상으로 채웠던 반면, 만초니는 상상의 세계를 중심축으로 하여 역사는 필요한 만큼만 가져왔다. 그래서 소설을 들녘의 풍경과 사회의 관습부터 다양한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와 행동까지 섬세하고 재기발랄한 묘사로 가득 채우고, 역사를 죽은 과거가 아니라 숨쉬며 말하는 현재로 살려낸다.

‘약혼자들’은 이탈리아의 국민소설이다. 이탈리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즐겨 읽고 공감하는 소설이다. 그런 한편 ‘약혼자들’의 이념적 한계를 지적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예로 그람쉬는 지역문제와 계급갈등 따위의 복잡한 이탈리아의 근대사를 주조한, 흔히 미완의 통일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한계를 담고 있는 소설로 비판한다. 민중의 생생한 재현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가톨릭교의 섭리와 지배층의 계몽주의적 주도에 이끌려 스스로 내면의 삶을 지니지 못하는 보호와 연민의 대상, 그리고 자발적인 실천과 해결의 주체보다는 감상에 찬 민족주의 감정에 휩쓸리는 수동적 모습으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엇갈리는 찬사와 비판 속에서 ‘약혼자들’은 20세기 이탈리아 비평계의 최대 논쟁거리들 중 하나로 떠올라 이탈리아 사회와 역사에 대한 반성의 틈을 벌려주었다. ‘약혼자들’은 그렇게 그 자체로 이탈리아의 현대사를 이루어왔다. 큰 소설 ‘약혼자들’의 국내 번역으로 이러한 이탈리아의 지적 맥락이 우리에게 펼쳐지길 기대한다.

(박상진·부산외국어대교수·이탈리아문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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