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구판절판


용이 될 때까지 춥고 배고픈 사람한테, 힘 약한 사람한테 해 준 것이 없다. 어려운 사람 위해 용이 피 흘리고 땀 흘리고 노력해서, 그래서 옥황상제가 '너는 용이 돼라' 했으면 자랑스러운 일이리라. 하지만 용이 될 때까지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영의주를 물었기 때문에 용이 되었다. 되기 전에 착한 일 한 것이 없으면 되고 난 후에도 해 준게 있어야 할 텐데, 그마저도 그렇지가 않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고 성이 나서 꼬리를 휘둘러 둑이 터지고 홍수가 난 이야기는 있다. 전설로 내려오는 용 이야기는 전부 백성 괴롭힌 것뿐이다. 잘해 준 것이 없다. 그보다는 학이 차라리 낫다. 개구리라도 지켜 주지 않는가. -33쪽

남들은 성공한 인생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다. 인생에서 성공은 무엇이고 실패는 또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기준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굳이 성공과 실패를 따지고 싶지 않다. 돌아보면 나는 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때로 제어하기 힘든 분노와 열저에 사로잡혀 피할 수도 없었던 상처를 받거나 입힌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양심과 직관이 명하는 바에 따라, 스스로 당당한 사람으로 살고자 몸부림쳤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작은 흙집에 났고, 거기에 새로 지은 큰 빕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 집에서 살다가 죽을 것이다. 이것이 내 운명이다.-34쪽

세속적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고 싶었다. 마음을 닦아 죽음과도 같은 이 고통을 극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배우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실패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일 뿐,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내 인생의 좌절도 노무현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주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이 진보의 모든 것을 망쳤다고 덮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노무현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옳은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노무현은 정의나 진보와 같은 아름다운 이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되어 버렸다. 나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 ......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실패는 뼈 아픈 고통을 준다. 회복할 수 없는 실패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 나는 이 고통이 다른 누구에겐가 약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쓴다. -36~37쪽

버림받은 사람은 도덕적 성숙을 이루기 어렵다. 자기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자부심이 있어야 모범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책임있는 주체로 참여시켜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기회, 참여, 책임...... 대통령을 하면서도 늘 이런 것들을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했다.-58쪽

계보를 챙기고 개인적 이해관계로 사람을 묶어 둔다고 해서 정치를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도자는 공정해야 한다. 신뢰, 헌신, 책임, 절제와 같은 덕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129쪽

조선 건국 이래 6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없었다. 권력의 편에 서야만 비로소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역사였다. 권력에 맞섰던 사람 가운데 패가망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손들의 앞길까지도 막아 버렸다. 적어도 무사하게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권력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비를 가리지 말고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던 기회주의 역사가 무려 600년이었다. ......
나는 이런 역사를 마감하고 양심과 신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하면 권력에 줄을 대는 방식이 아니라 나름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 살아온 유능한 사람들을 국가 운영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40~141쪽

나는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했다. 김구 선생은 민족의 해방과 통합을 위해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까지 뜻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권력에서 패배했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 현대사의 존경받는 위인은 왜 패배자뿐인가? 우리 역사는 정의가 배패해 온 역사란 말인가? 정의가 패배해 온 역사를 반복하면서, 아이들에게 옳은 길을 가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나는 남북전쟁 종식을 눈앞에 두고 했던 링컨 대통령의 두번째 취임 연설문을 읽으면서 '정의를 내세워 승리한 사람'을 발견했다. 링컨은 선거에서 숱하게 떨어졌다. 대통령 재임중에는 누구보다도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노예제 폐지론자와 노예 소유론자들이 모두 그를 공격했다. 인기도 없었다. 그러나 링컨은 내전에서 패한 남부를 적으로 몰아 세우지 않앗다. 남과 북을 선과 악으로 갈라치지도 않았다. 승리니 패배니 하는 말도 쓰지 않았다. 정의와 평화, 연방의 통합을 위해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자고, 모든 이를 사랑하자고 호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노예제 폐지와 연방의 통합, 둘 모두를 이루었다.
-162~161쪽

링컨의 연설문을 읽으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위안을 얻었다. 역사를 보면 정치인들이 집단적 불신과 적대감을 부추기는 곳에서는 언제나 불행한 일이 생겼다. -161쪽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였다. 우리 역사에 그런 지도자는 없었다. 정말 오랜 기간 동안 독재와 싸웠다. 암살 위기도 겪었다. 구속당하고 연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래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국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나면 그런 사람은 보통 투표할 필요도 없는 수준의 지도자가 된다. 건국의 아버지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 비츨라프 하벨, 레흐 바웬사 대통령이 모두 그랬다. 그것이 정상이다.-188쪽

진보적인 대통령이라도 보수의 네트워크에 포위되어 고립당하면 힘을 쓰기 어렵다. 변명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나는 그런 조건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낮은 것도 같은 원인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데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205쪽

한나라당과 보수신문들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집권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다. 진실이 아니다. 그 반대가 진실이다. 우리가 집권하기 전 한국경제는 엎어져 있었다. 2003년과 2004년에 카드채 위기가 닥치면서 다시 휘청거렸지만 참여정부가 붙들어 똑바로 흔들리지 않을 만큼 탄탄한 체력을 길럿다. 이것이 진실이다.-208쪽

검사들이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을 온 국민에게 보여 줌으로써, 적어도 내가 검찰을 정치적으로 악용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해소하는 효과 정도는 있었다. 나는 검찰의 중립을 보장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273쪽

그들은 임기 내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했다. 나는 그 신문들과 끝없이 싸웟다. 그들은 몇 백만 부의 발행부수로 표현되는 막강한 미디어의 힘으로 나를 공격했다. 논리의 힘, 사실의 힘, 진실의 힘이 아니엇다. 그러나 나는 그 싸움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만 가지고 싸웠다. 사실의 힘, 논리의 힘, 진실의 힘만으로 싸웠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역사적으로 전치적으로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믿었기에, 패배했지만 끝까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276쪽

언론은 시민의 권력이어야 한다. 시민을 대신해 정치 권력과 시장 권력을 감시하고 제어함으로써, 권력이 시민의 권리와 가치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그리고 정치 권력과 시장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공론의 장을 관리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그런데 보수신문들은 과거에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거기에 풀려난 다음에는 이 권력 저 권력에 유착하고 제휴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제휴해서 가다가 김영산 후보로 옮기면서 노태우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망가뜨렸다. 그 다음에는 이회창 카드를 쥐면서 김영삼 대통령을 완전히 밟아 버렸다. 공정한 심판이라는 본연을 내던지고 권력의 대안과 결탁해 직접 그라운드로 뛰어든 것이다.-279쪽

정책의 차이가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감정싸움은 몸싸움으로 전환한다. 모든 정당에서 강경파가 발언권을 장악한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발붙이기 어렵다. 국회의원을 대폭 물갈이해도 소용이 없다. 이것이 내가 20년 동안 경험한 대한민국 전치의 근본 문제였다.
성숙한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이루려면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도 바꾸어야 한다. 지역감정을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모든 지역에서 정치적 경쟁이 이루어지고 소수파가 생존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인재와 자원의 독점이 풀리고 증오를 선동하지 않고도 정치를 할 수 있다.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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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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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2 1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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