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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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놀랍다. 무엇보다 역사 드라마는 우리가 몰랐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 주니 그건 가히 보물 같은 것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역사 드라마를 믿는 사람은 없다. 역사 드라마란 그저 있었던 사건에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니 그저 그것이 하나의 가교 역활을 해서 덕분에 그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일종의 흥미유발 정도가 전부가 아니겠는가.  

몇년 전, 한 TV 드라마에서는 정조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를 모은 바있다. 그 바람에 유독 그때를 전후해서 정조 관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었다. 나 또한 그 드라마가 아니었으면 이 '정조'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관심을 가졌을까? 하지만 난 그 드라마 덕분에 정조에 대해 관심은 가졌지만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그에 관한 어떠한 책도 재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야 이책을 접하면서 정조 읽기의 숙원(?)을 풀었다.고 한다면 너무 속보이는 언사려나? 

사실 글은 말 보다 강한 임펙트가 있다. 말은 한번 뱉어 버리면 흔적이 남지 않지만, 글은 그렇지가 않다. 특히 그 글이 여러 사람을 두루 아우르지 않고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한 글일 때 그것이 받는 사람에게 어떤 것일까? 특히 우리는 편지라고 하면 사랑하는 연인끼리 주고 받는 '연서'를 생각할 때가 많다. 그도 그렇지만 만일 임금에게 받는 편지라면 어떨까? 임금도 인간인지라 생면부지의 일개 백성에게 편지를 쓸리는 없고, 그에 상응하는 신하들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는 건 가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정조가 놀랍게 다가 왔던 건, 그 어찰(임금의 편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 믿을만한 신하들과 나눴던 것이 아니라 임금과 대립했던, 다시 말하면 정적에게(도) 보냈다는 것이다.  

알겠지만 그 사람이 유능한 정치가냐 아니냐를 보여주는 건, 뛰어난 언변이나 정책이 말해주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정적을 얼마나 요리(?)를 하느냐가 관건인지도 모른다. 심환지(1730~1802). 그는 유감스럽게도 정조의 믿음직한 신하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조의 반대편에 서서 조금의 틈만 있으면 그의 왕권을 무력화 시킬려고 했던 사람이다. 정조는 왜 그토록 자기를 미워했던 신하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던 것일까? 앞에서도 썼듯이 정조는 정적조차 자기편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데 하물며 정적이랴? 어르고 달래지 않으면 살얼음판 같은 조정을 이끌고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중심에 심환지가 있었다.  

원래 임금에게서 어찰을 받으면 그 수신인은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왜냐하면, 임금의 어찰은 극비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정조의 경우 극비에 속하는 내용이 많았고, 그것의 철저한 비밀유지를 위해 폐기를 요구한 밀찰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3p) 하지만 심환지는 그러지 않았다. 할 수만 있으면 정조가 보낸 편지는 최선을 다해 보관하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책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추측컨대, 그에게도 정조는 정적이었다. 나이도 그가 정조 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거의 아버지뻘 이거나 못해도 작은 아버지뻘은 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달라진다. 미워도 미움이 다가 아니고, 사랑해도 그 사랑이 전부가 아니다. 모르긴 해도 심환지는 정조를 볼 때 애증과 연민을 교차하고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정조의 편지는 당시 돌아가는 정치의 판세를 어느 땐가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써 먹는데 사용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도 선비일진대 나라에 대한 충절을 앞세우면서 누대에 걸친 종묘사직을 바로하기 위함이란 대의 명분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임금의 편지다. 이것을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으랴? 아무리 법이 그러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정조는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낼 때 나라에 대한 극비 사항만을 논하기 위해 편지를 사용했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서같은 쪽지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도 볼 수가 있는데, 인자한면도 있지만 아버지 같고, 작은 아버지 같은 사람을 심하게 꾸짖는 내용도 있어 우리가 정조에게 보는 어진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기도 한다. 역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될 것인데 당시 심환지는 정조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기 위해 그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을런지 모르지만, 우리 후대의 사람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사료가 되었겠는가? 

사실 이렇게 심환지가 가지고 있는 어찰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정조 이미지를 깨우긴 하지만, 나는 그래야만 했던 정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마이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동서양 어느 임금, 어느 군주에게나 통하는 뭔가의 아우라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조가 임금이 되지 않았다면 심환지를 어떻게 대했을까? 상상해 보면 알 수도 있는 면모라고 생각한다.   

이책은 사실 그다지 두꺼운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읽기는 녹녹치 않다. 저자가 정조 어찰이 갖는 면모를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도판도 세심히 사용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거기에 나온 정조의 필체는 거의 악필에 가깝다(적어도 내가 볼 땐). 하지만 정조는 너무도 바빴던 임금이었다. 일일이 퇴고할 여력이 없었고,  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람이 심환지 한 사람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또 그럼에도 불불구하고 당시 씌였을 의성어를 과감하게 사용함으로 그의 유머와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과연 멋진 임금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정조는 역대 어느 임금 보다 어찰을 많이 썼던 임금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린 편지가 갖는 위력이 어느 만큼일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 내 속내를 들어내 보여야 할 때, 편지만큼 강력한 도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린 이 '편지쓰는 마음'을 점점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그것이 아니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도구는 많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또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갇혀서 나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하긴, 정조 시대 때 달리 마음을 표현하고 전할 수 있는 도구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흔히들 편지를 아날로그의 산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은 예견하기를 좋아하는 동물이어서, TV가 나왔을 때 영화가 살아 남을까를 걱정했고, 책의 종말을 예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디지털 시대라고 하는 이 최첨단 시대에도 버젓이 살아있다. 하물며 편지의 종언을 얘기할 자 그 누구랴?  

아마 모르긴 해도 심환지만큼 정조에 대해 가장 잘 말할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조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 정조의 마음을 뒤엎고 그는 정조의 또 하나의 정적인 정순왕후의 치세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정조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다(지금까지의 정설로는 심환지가 정조를 죽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책의 저자는 정조가 독살 당하지 않고 자연사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겠구나 싶기도 하다). 그런 심환지의 마음은 또 어떠 했을까? 정치도 정적도 세월 지나면 무의미한 것을. 정조의 죽음 앞에 가장 많이 슬퍼했을 사람은 바로 심환지는 아니었을까? 그런 심환지도 결국 가고, 그가 남긴 정조 어찰은 이렇게 남아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심환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편지는 이러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이책을 읽으면서 정조의 면모를 새롭게 알 수 있게되서 좋았다. 한번쯤 읽어 보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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