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이번에 처음 나온 건 아니다. 전에 <하나님은 당신에게 실망하셨다>란 제목으로 나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제목을 바꾸고 다시 나왔다. 역시 뭐든지 제목이나 이름을 잘 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먼저 제목은 왠지 거부감이 들어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제목을 이렇게 바꾸고 나오니 좀 읽어 볼 생각이 든다. 물론 이전 제목이 더 낫다고 할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난 이 제목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건 원제가 아니다. 원제는 먼저 쓴 제목이 맞다. 그렇다면 원제를 쓰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작가가 왜 그런 제목을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작가가 정한 것을 존중해 줄 필요는 있지 않을까. 물론 원작자와 충분한 상의 끝에 정해진 거라면 이의를 달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독자로서 결론부터 얘기하 지면 이 책은 어떤 제목으로 나왔던 나와는 너무 안 맞는 책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과연 기독교인일까 의문스럽다. 가끔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비기독교인들도 성경에 관한 책을 쓰는 것 같긴 하다. 그것이 성경의 권위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겠는데 그러기는 쉽지 않다. 또한 난 그런 책에 내 시간과 여력을 바칠 생각이 전혀 없다.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책까지 읽는단 말인가. 사실 내가 이 책을 읽어 볼 생각이 있었던 건 이 책은 그런 류의 책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뭔가 성경을 좀 더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것 아는가? 4, 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성경은 <성경젼서>라고도 했으며 세로로 쓰였다는 사실을. 말에 의하면 한자어 성경을 한국말로 옮겼다고도 했다. 그러니 얼마나 딱딱하고 어려웠겠는가. 거의 고어 수준의 문어체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을 읽고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읽고 싶다고도 했다. 또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성경을 읽고 회심한 사람의 이야기가 곳곳에 넘쳐난다. 고어 수준의 딱딱하고 재미없는 책이라면 잊히는 책이 되어야 할 텐데 그 책은 오늘도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적어도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에 번역된 새로운 성경의 종류만 해도 꽤 여러 종류가 나왔다. 당장 나만해도 3, 4 종류의 버전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걸 보면 성경이 얼마나 쉽게 독자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지 알 것도 같다. 그뿐인가, 저명하고 신뢰할만한 학자나 기타 저자들이 성경을 이해시키고자 각종 연구서와 강해집, 에세이들을 얼마나 쏟아 놓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권위는 인정받았을지 모르지만 대중성을 얻는 데는 실패한 듯하다.       


어쨌든 그런 것을 볼 때 성경은 꼭 그렇게 권위 있는 학자나 저술가들에 의해서만 새롭게 쓰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회의가 없지 않다. 일반인들도 자신만의 성경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난 그런 시도를 하기도 했다. 물론 하다가 중단하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어쨌든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저자는 어떻게 자신만의 성경을 썼을까.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당황스럽다 못해 화가 났다. 난 정말 저자에게 묻고 싶다. 저자가 바뀐 책 제목에 동의를 했던 안 했던 "성경에 정말 이런 내용이 있어?"라고 묻는다는 건 있다는 동의를 구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난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냐?"라고 묻고 싶다. 비근한 예로 저자는 아브라함이 득남을 기념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할례를 주었다고 썼다. 정말...? 그거 하나 진짜인지 아닌지 찾아보는 건 그러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언제 사라가 아브라함을 시켜 그의 첩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없애라고 시켰는지 모르겠다. 내가 알기론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는 이유로 자기 주인인 사라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인다. 게다가 구약의 요셉이 농무성 장관이라고? 언제 총리대신에서 그렇게 강등된 것일까?  


뭐 또 그것까지도 그렇다고 치자. 알다시피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지만 나중에 그렇게 이 책에 표현한 대로 농무선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는 꿈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단련을 받고 훗날 그 같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가를 드라마틱하게 잘 보여 준다. 거기엔 요셉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어떻게 화해하고 용서를 하게 하시는지도 더불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히 이미 너무 크게 성공해 버린 요셉에게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형제들을 동정하고 싶었는지 살아남으려면 그 앞에서 아무리 굴욕적이더라도 머리를 조아려야지 별 수 있냐는 식으로 마무리하고 만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그러기엔 이 이야기는 스케일이 제법 크다는 생각은 안 해 본 걸까.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은 이 이야기만으로 여섯 권짜리 장대한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창세기에는 2장인가 2장 반 정도밖에 안 되는 분량인데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할 때 단 몇 줄의 조크를 시도했다는 건 오히려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 준 꼴 밖에 더 되겠는가. 


문제는 또 있다. 입다와 그의 딸에 관한 이야기다. 입다가 영토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했을 때 제일 첫 번째로 자신을 맞아주는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장면이다. 그런데 하필 딸이 자신을 맞이해 줄 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드리는 수밖에. 그런데 성경 어디에 저자가 제시한 딸을 불에 태워 바쳤던가? 성경엔 아버지께 두 달의 말미를 달라고 하곤 친구들과 함께 산속에 들어가 시집도 못 갈 자신의 운명에 실컷 울고 그 후 평생 독신으로 하나님만 섬기고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말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동물을 태워 바치기는 해도 사람을 산 채로 태워 바친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건 당시의 이방신들이 그렇게 했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혐오하셨다. 요는 저자는 여호와와 이방신을 아무런 확인이나 거리낌 없이 동격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그들은 꽤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다. 또 그것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아이를 낳지 못한 부부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양 하나의 우스개 소리로 치부한다. 즉 아브라함이 90살이 될 때까지 고령으로 사라와 무수한 섹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골반 탈구와 부은 발목 말고는 아무것도 잉태하지 못했다(22p)고 쓰고 있다. 도대체 말인지 방귀인지 알 수가 없다. 저자는 아직 90 노인은 아닌 줄 아는데, 자식이 없는 90 노인을 그런 식으로 대놓고 비아냥거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저자 같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다는 얘긴가? 저자의 인격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 밖에도 문제 되는 표현과 내용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아무리 성경 에세이고, 유머와 독설의 카타르시스라고 하지만 성경이 이렇게까지 웃음거리로 전락시켜도 좋을지 의문스럽다.


물론 이 유머와 독설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저자가 얼마나 웃기려고 눈물겹게 노력했는지 알 것 같긴 하다. 실제로 미국 독자들이라면 많이 웃었을 것 같긴 하다. 그들은 조금만 웃겨도 깔깔대고 웃지 않는가. 웃음의 포인트도 좀 다른 것 같긴 하다. 오래전 미국 시트콤을 보면 별 웃기지도 않은 장면에서도 관객들이 박장대소하고 하는 걸 보면서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너무 안 웃는다고 비판하곤 했다. 웃는 것조차도 비교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래저래 경직된 것 같긴 하다. 그 덕분에 모든 것을 할 수만 있으면 희화시키려고 하는 것엔 비판할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다.


아마존에서 5점 만점에 4.5를 받았다는 건 무슨 기준일까. 아마존엔 유머 도서 코너가 따로 있는 걸까? 그래서 유머 지수가 높아서 그런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건가? 어쨌든 그 기준이 의문스럽고 더구나 우리나라 집계는 아니다. 그런 것에 혹해서 책 구입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실제로 이 책에 대한 리뷰 점수가 대체로 높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성경은 너무 어려워 읽다가 포기했는데 이 책은 너무 재밌어 끝까지 읽었다는 식의 평가가 높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의도했든 안 했던 저자는 너무 유머와 독설에 치중하다 보니 성경을 거의 날조하다시피 했는데도 그것에 대해 분노는커녕 문제제기도 할 생각이 없는가 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아무리 유머도 좋다지만 원문은 침해하지 말아야하지 않는가. 더구나 성경이다.  


사실 성경이 쉽지는 않다. 성경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경전은 하나 같이 어렵다. 불경은 쉬운가? 코란은? 그래서 못 읽겠다면 그건 독자의 선택이지 그것을 어렵게 전해 내려온 경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교가 됐는 그 신을 믿기로 작정했다면 그 신에 대해 말한 책에 도전해 보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다. 어떠한 경우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알고자 함에 있지 깔깔대고 웃고자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도 예기했지만 성경을 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노력을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지 않는다면 그건 줘도 못 먹는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우리나라 기독교 저서들은 얼마나 번역되어 있을까 새삼 궁금해졌다. 나는 최근 한 성서 출판사에서 성경을 스토리텔링으로 푼 책을 한동안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그건 순 우리나라 저자들로만 구성해서 쓴 책인데 경탄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이 책들은 얼마나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을까 궁금했던 것이다. 모든 면에서 K가 거의 독점을 하다시피 했다. 하다못해 방역도 K 방역이라지 않는가. K 크리스천 출판물도 못지않을 텐데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과연 이 책을 읽었다고 성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까. 물론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정말로 성경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어느 정도 그 권위를 인정받은 다른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를테면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이나 앞서 말한 <스토리텔링 성경>, <쉬운 말 성경> 같은 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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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7-15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성경 한번 볼까 하고 앞에만 보다 말았습니다 어떤 책은 이야기 식으로 돼서 다른 성경보다 재미있기도 했는데, 앞부분밖에 못 보다니... 지금은 그 성경이 없네요 성경도 재미있다고 말하고 싶었나 하는 생각이 조금 듭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웃는 게 다르기도 하지요


희선

stella.K 2020-07-15 15:32   좋아요 1 | URL
맞아요. 구약은 출애굽기 이후로 좀 재미가 없지요.
그래서 그부분만 때가 타 있잖아요.
성경을 좀 재밌게 읽을 필요는 있는 것 같긴한데
이 책은 좀 비추더군요.

저는 잘 웃는 편이 아닌데 한번 웃었다하면 마구 웃는
B형이랍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