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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ㅣ 밥보다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평점 :
책이 나왔을 때 반갑기도 했지만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일기에 관해 뭐 할 말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특히 학교 때 일기 쓰기 숙제에 학을 떼어 본 사람이라면 뭐 이런 책을...? 하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이 척 보기에도 “나 그렇게 지루한 책 아냐.”라고 말 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다. 하긴, 일기 쓰기에 대해 철학적이며 인류학적이고, 기록학적 고찰을 해 놓았다면 누가 일기를 쓰고 싶어하겠는가? 더구나 저자는 유쾌하게 강연하기로 소문났다. 그런 그가 이 머리 아픈 주제를 어렵게 쓸리 없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은근히 아니 대놓고 집요한데가 있다. 물론 저자의 집요함은 이 책에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닌다. 지금까지 저자의 책을 빼놓지 않고 읽은 건 아니지만 저자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그걸 아기 다루듯 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하려는 측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 얼마 전 낸 <서민 독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거기엔 저자가 읽어 온 책이 빼곡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 건 결국 책 읽기에 대한 (강력한)촉구다.
이 책도 어찌보면 그 연장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읽는다면 다음엔 써야한다. 일기 하나를 잘 쓰기 위해 책을 읽으라고 강(요)조하고 있다. 도대체 일기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기도 하다. 그야말로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싶기도 할 것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일기 한 권은 잘 쓴 에세이 10권 부럽지 않은 경우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이 별것 아닐 것 같은 일기에 이토록이나 정성스럽게 강조하는 것을 보면 집요함을 넘어 진정성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요즘 글쓰기에 관한 책도 많이 나오는데 저자도 그냥 글쓰기에 관한 책 한 권 내지 뭐 이렇게까지 하는데는 뭔가의 이유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중학교 이후 누가 일기를 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지. 무엇보다 내가 쓰지 않는다. 내가 쓰지 않는데 감히 누구한테 권할 수 있겠는가? 물론 내가 쓰기 때문에 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뻔하다. “너나 잘하세요.” 그런데 가끔은 어렸을 때 들었던 그 잔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일기 쓰이기도 하다. 옛날 같으면 참견 같아 듣기 싫을 것 같은데 비록 책이긴 하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뉘라서 그런 말을 해 준단 말인가? 더구나 저자 특유의 솔직함과 유머를 대하니 누구라도 일기를 안 쓰면 안 될 것만 같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교육이 초등학교 때까지는 일기 쓰기가 거의 의무로 되다시피 하지만 중학교부터는 권장만 하고 관리는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일견 이해한다. 좋은 습관 길러준다는 것과 내가 맡은 아이가 방학 때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맞춤법 향상을 위해 그 숙제는 꽤 유용해 보인다. 그러나 중학교쯤 되면 사춘기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 줘야한다. 무엇보다 일기는 비밀 유지가 되야하는 하는데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보는 거라면 일기는 이미 일기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선생님들이 바쁜데 일일이 일기 검사까지 할 여력이 없다.
하지만 저자가 제안하는 것도 타당성은 있어 보인다. 저자는 일기 검사를 전담하는 빨간펜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네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첫째는 학생이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어야 하고, 일기 검사는 매일 이루어져야하며, 검사자가 학생의 일기를 읽고 난 뒤 오타나 비문 등을 고쳐주고 보다 매끄러운 문장이 되려면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려 주며, 검사자가 학생의 일기에 자신의 견해를 달아줘야 한다(60p)고 썼다.
물론 안 그래도 예산이 부족한데 무슨 일기 전담 빨간펜 선생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육 선진국일수록 작문을 중요시 한다. 즉 학생의 글로 표현된 생각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은 좋은 글에서 나오며, 좋은 글은 좋은 생각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디 그런가? 도무지 생각할 시간을 주질 않는다. 말은 그렇게 아이들의 자율성과 일기의 비밀성을 들어 거부할지 모르겠지만 일기가 아니면 작문 교육을 대체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비문에 줄임말에 청소년용 육두문자가 남발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자신이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도 모르고 졸업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일기의 비밀성이 보장되지 못하면 또 어떤가? 나의 글과 나의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는 선생님이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더 열심히 일기를 쓸 학생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비밀성이 보장되지 않은 열린 일기가 되어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일기 쓰기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는 건 그 자체가 지루하고 의미없는 행동이라기 보단 생각, 사고를 중시하지 않는 시스템 때문은 아닐까? 또한 이 작문이란 것도 무엇에 대해 쓰라고 하면 너무 어렵다. 주제가 주어지지 않은 일기 같은 글부터 쓰게 하는 것이 접근하기에 더 좋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고 얼마나 좋은가?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뭐 일기에 대해 할 말이 있을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독자를 쉽게 봐도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읽을수록 저자의 내공이 느껴지면서 목차를 정하고, 메모를 하고 내용을 채워나가기까지 뮤즈는 끊임없이 저자를 흔들어 놓았겠구나 싶다. 특히 요즘 ‘소확행’이 유행인데 일기 쓰기 역시 그 품목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 읽으면서 얼마나 킥킥대고 웃었던지. 마치 명랑 만화를 보는 것 같았다.
저자는 요즘의 SNS가 활성화 되면서 오로지 ‘좋아요’에만 목맨 영혼없는 글에 대해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다면 블로그 글쓰기는 어떤가? 난 중학교를 입학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블로그가 생기면서 일기를 안 썼다. 블로그 활동을 하는데 굳이 일기를 또 써야 하나 싶었고 이건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저자도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이게 나름 반갑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무엇보다 난 이 시기를 일기를 쓰지 않았던 시기로 봐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블로그로 대체했으니 여전히 썼다고 봐야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저자는 그것을 가르기 보단 일기와 블로그의 장단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여기서 일기 쓰기란 노트에 쓰는 아날로그적 방법을 말한다. 블로그는 다분히 보여지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솔직함이 어느 정도 희석된다. 그런데 비해 일기는 100% 솔직해질 수 있다. 솔직함이 꼭 좋은 것이냐는 것엔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어 보이지만 그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내가 내 자신에게 솔직해질 필요는 있다. 그렇다면 일기는 필요하다. 솔직해져야 한다고 해서 블로그에 있는 그대로 까발리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쓰면 누군가 볼 거란 전제가 있기 때문에 싫어도 몇 번의 정서를 거쳐야 한다. 낙서 같은 글이건, 각 잡고 쓰는 글이건. 그런 점에서는 블로그가 더 유리하다.
솔직히 나는 일기는 좀 함부로 막쓰는 경우가 많다. 블로그는 첫 문장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할 때가 많지만, 일기는 왜 이 문장부터 썼지? 후회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미 쓴 문장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만 알아보면 되니까. 이 세상 어디엔가는 마구 망가져도 누가 뭐랄 것 없는 곳 하나는 있어야 한다. 예전에 정서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한 번 있는 그대로 글을 블로그에 올렸던 적이 있다. 그러고 그 다음 날 당장 내렸다. 정말 저자의 말마따나 맞춤법이고 뭐고 무시하고 글을 올리면 없어 보이기 딱 좋다. 내가 뭐 그렇게 풍성하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없어 보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어쩔 수 없이 그때는 발견되지 않는 오탈자라면 모를까 고쳐 쓸 수 있는데 맞춤법 무시하고 올린 글 보면 인상이 찌푸려지던데 내 글이라고 오죽할까 싶은 것이다. (그래도 맞춤법은 어렵다.ㅠㅠ)
특히 항상 글을 잘 써야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일수록 일기는 숨어서 쓰기에 좋은 글 같다. 또한 블로그에 글을 써서 좋아요도 많고, 댓글도 많이 받으면 좋긴 하지만 그것에 일일이 답글을 달다가 분위기에 휩쓸려서 정작 써야할 글을 못 쓰거나 의지가 꺾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보면 블로그 쓰기는 양날의 검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지적대로 일기와 블로그 쓰기는 적당히 활용하면 좋을 것이지 어느 한쪽을 편들 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굳이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일기를 더 우위에 두고 싶다.
난 올해부터 다시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15년만의 일이다. 물론 여러 가지로 도전이 많이 있었다. 올초 일기에 관한 책 한 권을 읽기도 했고, 알라딘에서 서재의 달인됐다고 다이어리를 보내줬는데 하루에 한 페이지가 아닌 반 페이지씩 쓰도록 되어 있다. 이 정도라면 메모 정도 밖엔 안되 진짜 일기 쓰는 사람에겐 불편하긴 할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전략 같기도 하다. 다이어리엔 메모 정도만하고 자세한 건 서재에 쓰라는(것 같은). 저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사진만 잔뜩있고 메모식의 영혼없는 글은 가급적 쓰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이 사회 시스템이 자꾸만 생각하기를 방해하고 편하고 간단한 것만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 같아 마땅치가 않다.
책을 보면, 일기 쓰기로 할 수 있는 일은 제법 많아 보인다. 더 정확히는 일기 쓰기가 동력이 돼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중 눈에 띄는 건, 자기 소개서다. 스펙이고, 토익 점수 따는 건 한때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도 계속 쓰게 되는 건 자기 소개서란 것이다. 내가 누군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스펙 쌓고, 토익 점수 따고, 시험 점수 올리느라 정작 내가 누군지에 대해 선듯 말할 수 없는 세상에 살게 되어버렸다. 그런 사람에게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그것은 하루 아침에 오지 않는다. 뭔가의 부속품으로만 살아갈 뿐 내가 누군지에 대해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일기 하나 잘 써서 성공했다는 사람도 적잖이 보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자주 꼭꼭 씹어 먹으라고 하곤 했다. 그때 난 너무 어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꼭꼭 씹어 먹으라니? 먹는대로 먹는 거지 꼭 꼭꼭 씹어 먹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게 나이들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꾸 고마운 생각이 든다. 그건 내가 밥 먹다 체할까 봐, 또는 생선 얹은 밥에 혹시 가시라도 걸릴까 봐 그렇게 먹으라는 것인데 세상에 밥처럼 밍밍해서 금방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식이 또 있을까? 그럴수록 꼭꼭 씹어 먹어야 하는 것이다. 하루를 반성하고 되새김질을 하려면 일기를 써야한다. 그것은 하루를 꼭꼭 씹어 보내는 일과 같은 일이다.
이 책은 유쾌하게 읽다가 맨 마지막에 잔잔한 감동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그건 일기를 통한 아버지와의 화해다. 내가 앞서 일기는 비밀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누구에겐가 읽혀질 것을 생각하고 쓰는 의도성도 있다. 왜 일기에 의도성을 포함시킬까를 생각해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또는 한 사람에게라도 더 이해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는 아닐까? 저자가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고 화해할 수 있게 된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옛 속담에 짐승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사람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다. 사람이 죽고 한 세대가 가기도 전에 잊혀질 사람이 기억되는 사람 보다 훨씬 더 많다. 그렇다면 그런 속담은 가능하지가 않다. 그나마 일기를 남기는 것이 확실한 방법은 아닐까? 그게 아니더라도 일기를 씀으로 해서 인생에 성공을 가져왔다는 사람도 많이 받다. 알지 않는가?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퇴보하고 나중엔 짐승처럼 변한다고. 일기는 정말로 써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