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없는 삶 - 불안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
필 주커먼 지음, 박윤정 옮김 / 판미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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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그 제목부터 호불호가 갈리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겐 뭔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논리적으로 대변해주고 있으니 사이다 같은 책일 것이고, 믿는 사람은 좀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나아가서 이 책에 분노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전자에 동조하지 못할 것은 확실하다.  

 

사실 처음엔 좀 화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처음 읽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거라 그다지 많이 화가 났던 것도 아니다. 먼저 저자는 1장에서, 신을 믿지 않으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없느냐고 했는데, 나는 여기서부터 저자가 시작부터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저자는 종교와 도덕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종교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종교 안에 도덕성이 포함되는 것이지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요는 저자는 이것을 같은 범주의 것으로 생각해 자신의 논리가 타당함을 독자로 하여금 주입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솔직히 그렇게 얘기를 하자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자들에게 더 많은 도덕성을 요구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인을 핍박하거나 거부할 때 가장 쉽게 꺼내들었던 카드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부도덕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당연 무종교에서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종교에서 도덕이 결여된 사람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도덕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에 대해 할 얘기가 없는 것이 아니나 여기선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하겠다. 

 

구원이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책은 그 어디에도 구원에 관한 언급이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즉 종교없는 삶이 그토록 타당한 것이라면 구원이 의미가 없고 그것을 반박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저자는 구원이란 게 뭔지 알지 못하거나 지나친 채 그저 현상학적 측면만을 나열했다. 저자는 신자로부터 종교가 있냐고 물어보는 게 꽤나 귀찮았던 것 같고, 그것을 위협적(?)으로까지 느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이해 못할 부분도 아닌 것 같다. 그런 질문을 한 두 번도 아니고 꽤 여러번 받았다고 생각해 보라. 더구나 교회에서 전도 프로그램 수련자가 실습하겠다고 재수없이 접근해 오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뭔가 반박할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비판대신 조금씩 이해하는 마음으로 읽어가다 보면 이 사람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꼭 그리 틀린 말도 아니겠다 싶다. 사실 저자도 무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논리적으로 증명해서 그렇지, 사실 책에 언급한 내용 거의 대부분은 이미 종교 진영 특별히 기독교에선 이미 위기로 인식하고 있는 것들이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무종교 진영에선 타당한 것들을 기독교에선 위기로 보는 시각의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뿐이다. 

 

예를들면, 저자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종교를 찾지 않는 이유라고 했는데 그도 맞는 얘기다. 직장 일하랴, 육아까지 떠안은 여성이 교회에 나올 확률은 극히 낮아 보인다. 더구나 교회 생활이 안식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사회성과 의무를 요구한다면 집에서 쉬거나 다른 활동을 하고 싶지 교회 나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옛날엔 여성들이 사회진출이 그리 많지 않으니 교회 나오기는 용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성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교회엔 아직도 남성의 비율 보단 여성의 비율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남녀를 떠나 그렇게 피곤해서 교회 안 나올 것만 같지만 나오는 사람은 나온다. 요는 저자가 무종교의 타당성을 증명하려면 교회 나오는 사람은 왜 나오는가에 대해서도 연구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데 어느 한 측면만 부각시키다 보니 객관성이 떨어지고 설득력도 별로다. 

 

물론 저자는 교회 다니는 사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연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가 만났던 사람은 자신의 논증을 뒷바침해 줄 사람만 만났나 보다. 저자가 미국인인만큼 미국에 국한시켜 연구를 했던 모양인데 세속화를 언급하면서 신앙이 있는 사람들 역시 보면 별 것 아닌 수준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교회도 세속화되고 있으니. 그러나 모든 교인들이 그런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오산이다. 그래도 얼마간은 구원을 믿으며 경건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비율에 낮아서 그렇지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율은 저자가 잘 써 먹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또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신앙 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을 안 믿는 사람은 급진적이고 맹신으로 매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희화화시키거나 조롱하기도 하고. 그것은 빠뜨린 채 도덕성 운운하는 건 좀 넌센스 아닌가?

 

저자는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 중 또 하나로 성소수자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것 역시 당연하긴 하다.기독교에선 기본적으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물론 요즘엔 일부나마 동성애에 대해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동성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라 저자가 제시한 것이 최근에 나온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치 요즘 나온 문제처럼 말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성소수자가 교회를 기피하는 것도 맞는 것 같긴하다. 그러나 조금 더 이성적여 보자. 정말 기독교만이 동성애를 부정해 왔는가? 그래서 마치 기독교는 이 성소수자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고, 또한 그로인해 그들은 기독교인에 대한 반감을 키워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를 기독교인만이 피박해 왔을까? 무종교나 타종교인들 중에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독교인에 집중되어 온 이유는 뭘까? 

 

저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종교없는 삶을 짚어내고 있지만 기독교라고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물론 기독교가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때로 위협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 역시 세속화가 위협이 되기도 한다. 세속화가 믿지 않은 사람에겐 신앙을 갖지 않을 근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이다. 전에 모 교수가 TV에서 과학은 하나의 가설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진화론도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고, 여전히 가설로 연구 대상인데 진화론은 마치 과학의 신이요 끝판왕처럼 신봉하는 반면, 창조론은 특정 종교를 표방한다고 해서 배제시켜 왔다. 가설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과학이라면, 창조론도 같은 관점에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미국이 기독교적 이념에서 출발한 국가가 아니라면서 대통령이 성서를에 손을 얹고 대통령직을 수락하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않은 대통령을 지목하기도 하고, 그밖에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위인들도 비기독교 내지는 비종교인임을 지적한다. 물론 그렇게 따진다면 저들의 입장에선 기독교 진영에서 위대한 기독교인을 추들며 기독교의 위대성을 말하는 것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위대한 사람은 종교인에서건 비종교인이건 다 나올 수 있다는 것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일제 강점기 국가적으론 패망이었지만 기독교가 그 시대에 했던 일은 가히 놀랍다 못해 위대했다. 그런데 그런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역사 교과서에선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그뿐인가? 아이들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도 대학만 들어가면 급속하게 신앙을 버리는 것에 대해 위기 의식을 느낀다. 게다가 나라 정책이 점점 비신앙을 옹호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하다못해 미션 스쿨에서도 성서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한다고 들었다. 이것을 단순히 저자가 나열한 무종교의 탁월한 예를들어 그냥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또한 저자는 죽으면 내세는 없으며 지금 여기의 삶을 살라고 하는데 물론 그럴 듯하긴 하다. 하지만 내세관 역시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철학이다. 그것을 단지 몇 페이지 또는 몇 줄만으로 긍정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내세관이 없는 것 보단 있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이 세상에서 싫은 사람을 죽은 후 저 세상에서도 만날 걸 생각하면 끔찍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저 세상에서 볼 수 있다면 사별의 슬픔은 좀 덜 하지 않을까? 또한 나쁜 사람들을 지옥이나 가라고 저주할 수도 없다. 아무리 비종교인의 우수한 도덕성과 교육으로 무장한다고 해도 죄까지 없앨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여기의 삶이 나쁜 건 아니지만 깊어지면 죄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걸 저자는 간과하고 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이미 적잖은 지면을 할애했고, 이런 논의는 한도 없고, 끝도 없다. 또한 이러는 나 역시 처음부터 종교적 인간이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도 교회를 다니지만 여전히 회의속에서 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무종교의 삶이 종교의 삶 보다 나을 거란 근거를 못 찾겠다. 저자가 이만큼 고민해서 이런 책을 썼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한 왜 종교적 삶이 합당한지 고민해 보겠다. 결국 이건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종교적 삶과 무종교의 접점을 찾는 책중 하나로 봤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고가 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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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29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 👏 전 언제 쓰죠? 오늘 도서관 못 가고 부모님 호출로 시골에 와서 노가다했네요 아 일정이 어그러졌네요 ㅋㅋㅋㅋㅋ

stella.K 2018-09-29 19:55   좋아요 1 | URL
ㅎㅎ 내일 쓰시면 되죠.
카알님은 어떻게 느끼셨을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