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요즘 친구들을 글감으로...) 오랜 경력단절 끝에 다시 직장에 다니다가 문제가 생겨 아쉽게도 몇 달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대충 입고 다니다가 일 다니는 동안은 잘 차려입으니 동네 소문이 다 났었는데 일을 그만두게 되니 만나는 사람마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일은 안 간 거냐?"묻더란다. 물론 상대방은 선의로, 인사치레로 물었겠지만 이쪽에선 매번 웃으면서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치곤 했는데 안 그래도 즐겁게 다니던 일을 그만두게 되어 속상한데 보는 사람마다 물어보니 더 마음이 안 좋았다고. 억지로 웃고 대답해야 하는게,,, 그 기분을 뭐라 설명하긴 힘든데 불편했다고. 나는 '정희진의 공부'6월호였나 희진 언니가 무례한 질문이나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 등에 엉뚱한 답을 해보라는 조언이 생각났다. 그래서 "정말 궁금해요?"라고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며 '정희진의 공부'에서 들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달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떠올린 거니까 꼭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고 너가 너의 목소리로 적합한 말을 떠올려보라고. 스스로 답을 찾아보란 식으로 말하며 일단 웃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는데 자신 없어했다. 그래서 우린 시험 삼아 전화로 연습도 했다. 그랬는데 오늘 친구가 전화로 하는 말이 실제로 그렇게 해봤다는 거다. 무려 두 번씩이나.ㅋㅋㅋㅋㅋㅋㅋ 해보니 별거 아니더라고. 그리고 그렇게 되물으니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더라는. 보통 "네 사정이 생겨 그만뒀어요 헤헤"하고 친절하게 대답하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정말 궁금해서든 역시 인사치레든 왜냐고 또 묻고 질문은 계속 더 길어졌었다고. 



그랬는데 오늘 '성의 변증법'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표면적으로는 친절한 말의 진정한 본질은 종종 아이나 여성이 웃어야 마땅한데 웃지 않을 때 드러난다. p.131



그리고 이어서 이런 글이 나왔다. 


웃는다는 것은 아동과 여성에게는 발을 질질 끌며 걷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또한 희생자가 그의 억압을 묵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 경우 모든 10대 소녀에게 있어서의 상습적인 신경경련과 같은 가짜 웃음에서 벗어나도록 나를 훈련시켜야 했다. 훈련은 실제로 진짜 웃을 일에만 드물게 웃고, 따라서 웃을 일이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해방운동을 위해 내가 '꿈꾸는'행동은 미소 거부이다. 그것을 선언하면 모든 여성들은 곧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한' 미소를 버릴 것이고 그 후론 오직 무언가 그들을 즐겁게 할 때만 웃을 것이다. p. 132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도 나랑 내 친구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니!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선언을 함. 그리고 책으로 남겼어. 험한 세상에 등불을 밝히듯이! 여기까지 읽고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남자들은 대부분 이런 고민 따위 해 본적 없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이런 감정노동이 여성, 아이들에게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지하든 못하든) 캣콜링 같은 성희롱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미소와 침묵을 강요받고 불편함을 겪는다. 이런 불편함은 결코 당연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권력'관계에 의해 이런 태도를 수용하도록 , 자연스러워지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어제 해외뉴스에 이런 기사가 있었다.


" 10초 이상 만져야 성추행 " 황당 판결에 분노한 이탈리아 <<링크


https://www.mbn.co.kr/news/world/4946100


로마의 한 학교에서 60대 학교 관리인이 여학생의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만졌는데 법원에서 10초 정도 그런 짓을 했을 뿐이라고 하며 무죄를 선고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분노한 시민들이 자기 몸을 만지는 이 '10초 퍼포먼스'를 sns에 올리는 등 온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근데 또 내 생각엔 여성들이 이런 영상 올리는 거 그 60대 관리인과 해당 판사는 즐길 것 같다. 남자들만 영상을 올려주었으면ㅋㅋㅋㅋ 그래서 난 남자 사진만 올림 )암튼 이것도 역시 미소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마땅히 받아들이길 바라는 의식의 산물이다. 






앞쪽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많아서 페이퍼를 남기지 못했는데 4장 '아동기를 없애자' 부터 너무 재밌다. 





 

  





남성의 자율성은 인간이 조건이지만, 여성의 자율성은 불가능하거나 이기성으로 간주된다. 이성애 제도와 가족제도가 결합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평생토록 치열하고 소진되는 협상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고, 이것이 인간의 인생이다. 민족주의부터 마르크스주의까지 다양한 남성 연대는 이를 주조하는 틀이다. -수치. 조애나 버트



  

  

   




"차 험하게 모시네요." 나는 항의했다. "좀 조심하든가 아니면 아예 몰지 마세요."

"조심하고 있어요." 

"당신이? 아닌데요."

"나 말고요. 다른 사람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다른 사람들이 비킬 거라는 거죠." 그녀가 우겼다. " 사고가 나려면 최소한 둘이 있어야 되잖아요."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7-16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바지 벗기고 엉덩이요? 늙은 남자가 미성년자를? 와 진짜 제가 눈앞에서 두드려 패고 싶네요. 아 증말 ㅠㅠ
저도 파이어스톤 열심히 읽고 따라갈게요. 수치 도 준비해 두었는데 미미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저 스무살 때 성추행 당하고도 웃었던 생각이 나 괴롭습니다. 전 아직도 그 일로 절 자책해요.

청아 2023-07-16 10:06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 사법부 수준이 참...ㅠㅠ 10초가 생각보다 길다는 걸 SNS시위가 보여주고 있다네요.
수치는 정희진 쌤 해제만 읽어봤어요. 좋은 책들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요즘입니다. 다락방님 저는 초등학교 때 눈앞에서 일어난 폭력에 아무것도 못하고 얼어버렸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죄책감과 함께 남아있습니다. 자책하지 않으셨음 좋겠어요.저도 그러려고 애씁니다.

페넬로페 2023-07-1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참 남의 일에 관심이 많죠.
시간이 많은가봐요 ㅎㅎ

10초!
도대체 그렇게 생각한 판사, 정말 기가 찹니다 ㅠㅠ

청아 2023-07-16 20:35   좋아요 1 | URL
이 친구가 발이 넓은 탓도 있긴한데
모른척해주는 미덕도 필요하다고 느꼈어요ㅎㅎ

한번씩 우리나라가 범죄자에 관대하다지만
저런 판결...한국에선 앞으로도 없겠죠? ^^

책읽는나무 2023-07-16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초!!!
판사가 거꾸로 당해본다면 10초 이상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자 10초 지났다. 신고해야지!!!!
그럴려나요??

청아 2023-07-16 20:40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처음 지상파 뉴스에서 보고 믿기지 않아
뉴스 기사를 다시 찾아봤어요.
이탈리아에 이런 보수적인 정서가 있었나? 싶고.
시민들이 침묵하지 않고 저렇게 대응하는 건 다행인데
피해자는 얼마나 황당할지... 이건 판사가 2차가해 하는 거죠.


독서괭 2023-07-20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초 그 건 대박이죠.. 황당무계. 이탈리아도 참 어디로 가는건지..
미미님 친구분 힘드셨을텐데, 좋은 방법을 찾아내셨네요! 웃지 않는 건 어려우니 ㅋㅋ ˝정말 궁금해요?˝라고 묻는 건 생각 못했는데, 괜찮네요. 예전에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그 글도 떠오릅니다. 직장이란 무엇인가? 출근이란 무엇인가?^^

청아 2023-07-20 19:20   좋아요 1 | URL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캣 콜링이 가장 심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납니다.
저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 거 정말 어렵죠. 형식적인 것들, 겉치레,...이런 것들이 의외로 많네요.

저 그 대목 읽었어요! 제목은 무겁지만 내용은 의외로 재밌던걸요.^^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이다. 다양한 시선이 경합하지 않고 하나의 시선이 지배할 때 우리의 인식은 축소되어 편협함을 벗어나기 어렵다. -6



어떤 친구에게 여성학을 공부하라고 거의 3년을 독려했다. 개인적으로 여성학을 공부하며 막막하던 세상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도를 아십니까'를 묻듯 권하지는 않았다. 각자가 짊어진 무게가 있고 자기만의 방식이 있으니까.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나부터도 질색이다. 그래도 이 친구는 '해결책'을 갈구하는 듯 보였고 그가 쏟아내는 많은 고민이 다 젠더와 얽혀 있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공부해 보라고 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처음에는 조금 하는 시늉을 하더니ㅡ'다 내 이야기다. 내 삶이 여성학이다.'하다가 ㅡ 놔버렸다. 또 문제가 터졌다. 한 시간을 때로 두 세 시간을 귀기울였다. 역시 또 젠더 문제였다. 공부하라고 했다. 본인도 그래야 되겠다고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결국 하지 않았다. 다시 그의 상황은 나아졌다. 할 이유가 아예 없어졌다. 그렇게 반복...반복...와 내가 이걸 3년 가까이 하니 이제 좀 지친다. 그간의 과정을 생각하면 내가 인내심이 대단하구나 하고 느낀다. 또 어떤 면에서 미련하기도 하고. (사실 혼자서 더 쎈 말들을 내게 던진다) 오늘에서야 내가 왜 그랬을까 이해했다. 나는 젠더를 떠나서는 이 세계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뼈져리게 느낀거였다. 그러니 기승전 여성학이었던거지...여성학을 공부하려면 남성 역사도 공부하게 된다. 문제를 알아야 하니까.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자기 경험 안에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시선이 경합하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사회문제도 남의 일인것만 같고 몰라도 사는데 지장 없는 것 같아진다. 기존 질서에 따라가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냥 그 시간에 내 공부 할껄. 책 한권이라도 더 볼껄. 이제는 그런 후회가 있다. 편협함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벗어나면 벗어날 수록 내가 편협하구나 느끼는 게 앎이고 자기확장이다. 그건 때로 쾌락 비슷한 기분을 주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구를 위해 대신 공부해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성장하길 원하는 동시에 성장하지 않길 원하고, 성적 쾌락을 갈구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며, 우리 자신의 공격성 ㅡ 분노, 잔혹성, 타인을 모욕하려는 욕구 ㅡ을 혐오스러워하면서도 그 원천이 되는 울분은 좀처럼 해소하려 들지 않는다. 고통 그 자체는 아픔의 원천인 동시에 안도감의 원천이다. 프로이트가 환자들을 대하며 가장 치유하기 어렵다고 여긴 것도 치유되길 거부하는 마음이었다. ㅡ비비언 고닉



이제 이 미친 짓을 그만하기로 한다. 우정은 그냥 우정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두 세시간 들어주지도 말자. 생각해보니 그에게도 좋을 게 없다. 되려 의도치 않게 배설 같은 피신처를 만들어 준 꼴이다. 그러고 보면 공부도 행동이다. 공부의 다소 정적인 모양새 때문에 그 에너지가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그 결과만 중시 한다. 공부도 칼로리가 소모된다. 이 행동은 또 다른 행동을 부른다. 최소한 지속하게 하는 힘을 준다. 



나는 아래 성폭력에 젠더를 넣어도 맥락이 이어진다고 본다. 


성폭력을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사회 문제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모른다. 성폭력 연구는 기존의 학문 체계, 인문,사회, 자연과학의 모든 전제에 도전한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지식을 다시 쓰는 분야다. 가장 중요하게는 연구 방법이 그러하고, 두 번째는 모든 개념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12




  




'상관이 접대 강요' 여경 실명 공개 "회유와 보복 당했습니다." <ㅡ


저 경관을 '여성'으로만 보는 이 파출 소장은 절대 젠더를 읽지 못할 거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니 보복을 하려고 한 거겠지. 자기 입장에서는 황당 할테니. 





비는 요란하게 내리고 내 미친 짓은 오늘로 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어떻게 질문할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이다. 다양한 시선이 경합하지 않고 하나의 시선이 지배할 때 우리의 인식은 축소되어 편협함을 벗어나기 어렵다. - P6

이 작품들에서 여성이 규정된 방식을 보자. 여성들은 악녀, 속물, 거짓말쟁이, 정신질환자 등으로 나타난다. 여성은 남성의 정신세계를이해하지 못하는 육체적 존재이며, 오직 사랑밖에 모르는 단순한동물, 남성의 ‘위대한 일‘을 방해하는 악마다. 간혹 좋은 평가를받는 여성 인물이 있다면 돌봄과 재생산 노동을 헌신적으로 수행하면서도 침묵하는 경우다. - P8

끝내 개츠비를 죽게 만든 데이지는 ‘쌍년‘이지만, 17 년간 함께 한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성을 죽게 했으며,
또 다른 여성의 헌신에 기대 살았던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는 천재다. 《안녕 내 사랑>에서 벨마의 신분 세탁은 위협, 경멸받지만 개츠비의 신분 상승 욕구는 위대한 삶으로 승화된다.  - P9

권력을 분석하지 않고 자유를 말하는 것, 타자를 주체로서 존중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예술적 사기다. 자유와 아름다움이 타자를모욕하며 형성되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속이며 추함이다. - P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진실이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어서 진실인 것이다.
- P7

제노사이드는 본디 성별화되어 남성은 죽이고 여성은 강간한다. 여성을강간, 강제 임신시킴으로써 여성과 아이 모두를 국가의 확장으로 여긴다. 남성 문화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자랑스럽고 - P11

성폭력을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사회 문제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모른다. 성폭력 연구는기존의 학문 체계,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모든 전제에 도전한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지식을 다시 쓰는 분야다. 가장 중요하게는 연구 방법이 그러하고, 두 번째는 모든 개념에 도전할 수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 P12

근대 정치학의 두 축인, 한국의 분과 학문에서 가르치는일반적인 ‘경제학‘이든 정치 경제학이든 그 전제에는 젠더가제외되어 있다. 여성의 몸이 자원화되는 성 산업은 그들의 연구 분야가 아니다. 경제활동에서도 성 역할과 여성의 감정 노동(혹은 여성화된 노동으로서 감정 노동)은 노동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않는 마음 heart‘ 으로 움직인다. 여성 노동의 성애화, 섹슈얼리티상품화 없이 인간의 노동은 설명할 수 없다.  - P12

이 책은 바로 성폭력은 젠더에 기반하지만, 젠더는 독자적으로 독립할 수 없음을 논쟁한다. 젠더 환원주의는 현실이아니다. 물론 마찬가지로 다른 사회적 모순들(인종·계급·종교·지역나이 등)도 젠더 없이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때문에 한사회에서 젠더의 인식론적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성폭력이남성 문화의 바람대로 정교하게 의미화되어야 ‘억울한 가해자‘도 발생하지 않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피해자의 지위와 무관하게 성폭력 개념이 엄밀하게 적용될 수 있다. 젠더를 모르는 상황에서 성폭력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폭력과 관련한 제반 상황(피해자 보호, 예방, 처벌, 지식 생산 등)이 어렵다는의미다. - P14

우리에게 익숙한 지식들은 대부분 자유주의 기능주의 실증주의에 입각한 연구 결과들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서가없는 이들의 역사, 말할 수 없는 경험, 드러나지 않는 사건을연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문제는 인간사의 대부분이 비가시화된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P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옥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갔다 왔으니까. 아마 천국도 어디 있겠죠. 돈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디다."p.349


 


진정한 배움이란, 우리가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할 수 있었던 것,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뉴스에서 범죄자들이 포토라인에 서기 무섭게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분노한 시민들의 정확한 워딩은 알 수 없는 외침이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의 피의자일수록 더 많은 조명을 받고 과거사, 개인사도 속속 까발려진다. 마치 영화 대사를 읊듯 자뻑에 취해 지껄이던 조주빈의 모습은 유감스럽게도 꽤 오래 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미국의 경우 굉장히 자세하게 범인의 여러 정보가 노출되기도 하는데 때로 그 가족들의 신상까지 털리는 경우도 있다. 성폭행이 미수에 그치고 심지어 재력가 집안의 아들인 경우도 그랬다. 부러웠다. 거기도 유전무죄지만 금수저도 죄를 저지르면 명예훼손 따윈 없다는 사실이. 살인, 성폭행, 스토킹처럼 육체와 영혼을 죽이는 범죄는 신상 공개가 최소한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사형제도에는 반대다. 어떤 경우라도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자기모순에 빠진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사형 집행자는 무슨 죄란 말인가? 





예를 들면 구제역으로 살처분되는 돼지들을 목격하는 공무원들의 트라우마가 심각하다. 구제역은 이제는 거의 정기적이라고 할 만큼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사각지대는 처우도 좋지 않다. 청소, 간호, 소방, 방역 등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이런 고된 업종은 사회적인 존경은 받지만 그만큼의 금전적 대가는 받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다. "영웅이 되었다가 토사구팽 당했다." 무려 19년 만에 총파업에 돌입한 보건 의료노조의 한 참여자의 말이었다. 희생은 마땅한 듯 요구받으면서 권리는 없다. 숭고한 직업이라는 과도한 인식 자체가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마치 공혈견처럼 쪽쪽 빨리며 대의를 위한 직업인으로써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기대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형제도는 해당 범죄와 행위자를 동일시해야만 가능하다. 즉 그가 저지른 범죄 이외의 인간다운 모습을 철저히 외면해야만 정당화된다. 하지만 범죄 행위 그것만이 그 사람의 전부인 그런 경우가 있을까? 위험인물이라고 결론이 나면 최대한 오래오래 사회와 격리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살인과 같은 끔찍한 범죄를 마주하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는 알고 싶어지지 않는다. 그런 개인적인 사실들이 그의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저런 생각을할 수 밖에 없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이 논픽션은 트루먼 커포티가 6년간 취재 끝에 완성했다. 결국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으며 여러 논란을 낳았고 또 논란 자체로도 인간본성의 여러 측면을 생각해보게 한다. 작품 자체만으로는 훌륭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했는데 아무래도 편견을 가지고 읽을 우려가 있으니 되도록 사전 정보 없이 소설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1950년대 한국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미국 중부 캔자스의 조용한 마을 홀컴에서 일가족이 살해당한다. 기독교가 지역의 가장 강력한 기반인 이곳에서 교회 활동은 물론이고 영향력 있는 여러 모임의 리더를 성공적으로 도맡아 존경받는 클러터씨가 가족들과 함께 살해당한다. 활동적인 그와는 달리 아내인 키드웰 부인은 몇 년째 자기 방에서 누워 지냈다. 이들 부부는 각방을 쓴 지 오래였다. 도리스 레싱의 비극적인 소설 속 주인공 같은 그녀는 네 아이를 키우면서 점점 무기력해졌고 신경 쇠약에 힘겨워했다. 남편과 달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뒤 유령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 반면 아이들은 밝게 자라 위의 둘은 타지에서 살고 어린 둘은 이 부부와 함께 지내다 함께 희생 당한다. 부인이 무척 불행해 보이는 것 빼곤 나머지 가족들은 모범시민. 그 자체였다. 엄마라는 존재가 저렇게 불행한데 이게 실제로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하고 사랑받는 그런 아이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이들의 그림은 이런 정도로 마무리된다. 






한쪽에는 이 평화로운 가족을 향해 죽음의 사자처럼 다가오는 두 남자 딕과 페리가 있다. 비상한 두뇌를 가졌지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눈이 함몰된 백인 남성 딕과 인디언, 아일랜드인 혼혈로 가무잡잡한 피부에 한쪽 다리를 저는 작은 키의 페리는 둘 다 감옥에서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수표로 사기를 쳐 돈을 좀 모은 뒤 한 건 올리기 위해 가든시티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스타킹을 사야 한다 아니다'와 같은 사소한 갈등을 겪기도 하는데 각자의 불행한 과거가 쌓여 너무 다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런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들이 과연 일가족을 살인하러 가는 사람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딘지 어설프고 너무나 평범하고 미숙하다. 




사실 이들은 처음부터 살인을 계획하고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페리는 형제들과 달리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평생을 아빠와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며 외롭게 살았다. 수녀에게 학대받은 어린 시절의 기억, 반복되는 꿈. 그의 바람은 그저 딕과 한 건 올리고 나면 그 자금으로 바다에 가라앉은 금화를 찾아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거였다. 372페이지는 꽤 충격이었다. 진득하게 이야기를 따라 가던 독자에게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난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체험해 보시길. 그 외에도 수감되었을 때 아들의 아버지가 판사에게 보낸 편지, 그의 누나가 그에게 보낸 답장, 군 시절 불과 몇 달간 알고 지낸 동기의 ㅡ전혀 예상치 못한ㅡ 우정 어린 편지는 이들도 그저 나처럼 소망하는 것들이 있고 이해받고 싶지만 때로 갈등을 빚고 아파하기도 하는 불완전한사람임을 절절하게 느끼게 했다. 앎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커포티는 가장 알고 싶지 않은 앎에 대해 자신이 믿는 진실에 대해 사진 같은 글을 펼쳐놓고 질문한다. 




딕은 페리가 한때 생각한 것처럼 "강한 놈"도 아니었고, "현실적"이거나 "남자답다"거나, "진짜 철면피"도 못되었다. 딕은 결국 자기는 "아주 약하고 수가 얕으며" , " 겁쟁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 순간 페리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딕이었다. 적어도 두 사람은 같은 종족이고, 카인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였으며, 딕과 떨어져서 페리는 "세상에 자기 혼자뿐인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치 온몸에 부스럼이 난 사람처럼.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치광이나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인 것처럼." ㅡp.396



그 친구는 모든 범죄는 단지 '절도의 변형'일 뿐이라고 말하고는 했었어. 살인도 포함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건 그 사람의 삶을 빼앗는 거지. p.440





"왜? 군인들이 잠을 설치는 것도 아니잖아. 군인들은 살인을 하고 훈장을 받아. 캔자스의 착한 사람들은 나를 살해하고 싶어 하겠지. 그리고 교수형 집행인들은 기꺼이 그 일을 맡을 거고, 사람을 죽이는 건 쉬워. 부도수표를 돌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쉽지. 이것만 기억해. 나는 클러터씨 가족을 1시간 정도 알았을 뿐이야. 내가 진정으로 그 사람들을 알았더라면 다른 느낌을 가졌을지도 모르지. 이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방식대로라면, 사격장에서 표적을 고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거야." p441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수하 2023-07-13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겨있던 책이지만 미미님 글을 읽으니 더욱 궁금해집니다.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보게 될 것 같아서 읽기 조금 두렵기도 하지만요...

청아 2023-07-13 14:29   좋아요 0 | URL
읽어본 바로는 수하님 두려워하진 않으셔도 돼요.ㅋㅋㅋㅋ 이 책을 읽은 자체로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그의 다른 책들도 더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잠자냥 2023-07-13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품에서 카포티가 심정적으로 페리라는 인물한테 거리두기를 실패했던 거 같아요(동일시에서 비롯된 연민, 그러다 우정 또는 사랑의 감정까지 등등)- 그런데 그 실패한 거리두기 때문에 희대의 명작이 탄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카포티 참 알수록 연민이 드는 사람입니다.

청아 2023-07-13 14:32   좋아요 1 | URL
‘실패한 거리두기 때문에 명작이 되었다.‘는 잠자냥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연기한 영화 <카포티>도 빨리 보고 싶어요.

물감 2023-07-13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책 있는데 이런 내용이었군요. 리뷰를 너무 잘 써주셔서 나는 이만큼 쓸 수 있을까 싶네요 ㅎㅎㅎ

청아 2023-07-13 14:39   좋아요 1 | URL
제가 진부한 편이라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데(머리카락을 뜯으며...)
잘 안되네요.ㅎㅎ 저는 물감님처럼 개성 있게 쓰는 분들이 늘 부러워요. 참고로 30페이지까지는 지루했는데
그 뒤로 사로잡혀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3-07-13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전이 뭔지 궁금하네요.
범죄자를 있는 그대로 보면 안되고 그 사람이 살아 온 과정도 봐야하는데
그래도 나쁜 사람이 너무 많으니 환경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무리인것도 같고~~
그렇다고 그것을 또 무시할수도 없고요.
참 어려워요~~
사형제도는 좀 그렇지만 형량을 늘여 피해자를 보호했음 좋겠어요^^

청아 2023-07-13 17:05   좋아요 1 | URL
아, 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마 이렇게 까지는) 처음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계속 그럴 수는 없겠죠. 그럴 수 있는 자료도 마음의 여유도 없고요.
최근에 협의를 통해 전반적으로 형량을 더 늘린 것으로 아는데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느낍니다.

책읽는나무 2023-07-13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딸이랑 사형 제도에 대해 얘기한 적 있었는데 딸은 흥분해서 사형 제도에 대해 완전 찬성하고 있었고, 그런 딸을 달랜다고 전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했네요.
극한의 죄에 해당된다면 무기징역이란 것도 있다고 하긴 했는데 무기징역도 형량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으니....이것도 참!!
구제역도 참....ㅜㅜ
울 큰동생은 소방 공무원이고 큰 올케는 군청 공무원인데 이 둘은 늘 주말에도 잘 못 쉬거든요. 정말 바빠요. 그렇다고 월급은 그리 많지도 않다더군요.
한 번은 올케가 조류독감에 걸린 닭을 폐사시켜야 하는 지시를 받고 집집마다 돌며...암튼 경황을 듣다 보면 공무원들도 참 수고가 이루 말할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올케한테 나라는 군인이 지키는 게 아니라 공무원들이 지키는 것 같다! 라고 말했더니 올케가 깜놀해서 손사래를..ㅋㅋㅋ
공무원들 얘기가 있어서 읊어봅니다.^^

청아 2023-07-13 19:24   좋아요 1 | URL
나무님 자녀분들과의 그런 이야기 재밌어요ㅋㅋㅋㅋㅋ
제 친구 중에도 사형 제도에 적극 찬성하는 애가 있어요.
우리 나라는 실질적으로 사형집행은 안하지만 선고는 내리고 있어서
논란도 많고 재부활을 바라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다시 집행할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형량을 더 늘리는게
현실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무님 집안에 공무원들이 있으시군요.
닭 폐사...ㅜ.ㅜ 그것도 너무 힘든 일일텐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분들이 많죠. 파업을 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겨우 들을랑 말랑이니 보면서도 답답합니다.

새파랑 2023-07-14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보관함에만 있는데 읽어봐야 겠습니다 ㅋ 표지가 안땡겨서 가만히 놔뒀는데 ㅎㅎ

역시 리뷰 천재 독서 천재 미미님~!!

청아 2023-07-14 10:57   좋아요 1 | URL
역시 소설 천재 새파랑님
보관함에 담아두셨군요ㅎㅎㅎ
중간중간 여러명의 편지도 있어서 좋아하실거예요.

서곡 2023-07-1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카포티에 친구 하퍼 리가 나오는데 한글자막이 서로 존대말이라 보는 내내 거슬리더라는...ㅋ 영화는 아무래도 호프먼의 연기 위주로 보게 되었는데 너무 기대하고 봐서 그런 것도 있겠고 또 다른 작품에서 워낙 연기를 잘했으니까 비교해서 이 영화 속 호프먼이 특별히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실제 카포티란 인물의 아우라가 세서 그런 것도 있겠고요

2023-07-15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5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5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곡 2023-07-15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제가 전에 읽은 책에 카포티 회고담 나온 게 있어서요 방금 페이퍼로 올렸어요 ㅎㅎ 그럼 즐주말하시길요!

2023-07-15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