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요즘 친구들을 글감으로...) 오랜 경력단절 끝에 다시 직장에 다니다가 문제가 생겨 아쉽게도 몇 달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대충 입고 다니다가 일 다니는 동안은 잘 차려입으니 동네 소문이 다 났었는데 일을 그만두게 되니 만나는 사람마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일은 안 간 거냐?"묻더란다. 물론 상대방은 선의로, 인사치레로 물었겠지만 이쪽에선 매번 웃으면서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치곤 했는데 안 그래도 즐겁게 다니던 일을 그만두게 되어 속상한데 보는 사람마다 물어보니 더 마음이 안 좋았다고. 억지로 웃고 대답해야 하는게,,, 그 기분을 뭐라 설명하긴 힘든데 불편했다고. 나는 '정희진의 공부'6월호였나 희진 언니가 무례한 질문이나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 등에 엉뚱한 답을 해보라는 조언이 생각났다. 그래서 "정말 궁금해요?"라고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며 '정희진의 공부'에서 들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달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떠올린 거니까 꼭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고 너가 너의 목소리로 적합한 말을 떠올려보라고. 스스로 답을 찾아보란 식으로 말하며 일단 웃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는데 자신 없어했다. 그래서 우린 시험 삼아 전화로 연습도 했다. 그랬는데 오늘 친구가 전화로 하는 말이 실제로 그렇게 해봤다는 거다. 무려 두 번씩이나.ㅋㅋㅋㅋㅋㅋㅋ 해보니 별거 아니더라고. 그리고 그렇게 되물으니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더라는. 보통 "네 사정이 생겨 그만뒀어요 헤헤"하고 친절하게 대답하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정말 궁금해서든 역시 인사치레든 왜냐고 또 묻고 질문은 계속 더 길어졌었다고. 



그랬는데 오늘 '성의 변증법'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표면적으로는 친절한 말의 진정한 본질은 종종 아이나 여성이 웃어야 마땅한데 웃지 않을 때 드러난다. p.131



그리고 이어서 이런 글이 나왔다. 


웃는다는 것은 아동과 여성에게는 발을 질질 끌며 걷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또한 희생자가 그의 억압을 묵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 경우 모든 10대 소녀에게 있어서의 상습적인 신경경련과 같은 가짜 웃음에서 벗어나도록 나를 훈련시켜야 했다. 훈련은 실제로 진짜 웃을 일에만 드물게 웃고, 따라서 웃을 일이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해방운동을 위해 내가 '꿈꾸는'행동은 미소 거부이다. 그것을 선언하면 모든 여성들은 곧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한' 미소를 버릴 것이고 그 후론 오직 무언가 그들을 즐겁게 할 때만 웃을 것이다. p. 132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도 나랑 내 친구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니!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선언을 함. 그리고 책으로 남겼어. 험한 세상에 등불을 밝히듯이! 여기까지 읽고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남자들은 대부분 이런 고민 따위 해 본적 없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이런 감정노동이 여성, 아이들에게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인지하든 못하든) 캣콜링 같은 성희롱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미소와 침묵을 강요받고 불편함을 겪는다. 이런 불편함은 결코 당연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권력'관계에 의해 이런 태도를 수용하도록 , 자연스러워지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어제 해외뉴스에 이런 기사가 있었다.


" 10초 이상 만져야 성추행 " 황당 판결에 분노한 이탈리아 <<링크


https://www.mbn.co.kr/news/world/4946100


로마의 한 학교에서 60대 학교 관리인이 여학생의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만졌는데 법원에서 10초 정도 그런 짓을 했을 뿐이라고 하며 무죄를 선고해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한다. 분노한 시민들이 자기 몸을 만지는 이 '10초 퍼포먼스'를 sns에 올리는 등 온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근데 또 내 생각엔 여성들이 이런 영상 올리는 거 그 60대 관리인과 해당 판사는 즐길 것 같다. 남자들만 영상을 올려주었으면ㅋㅋㅋㅋ 그래서 난 남자 사진만 올림 )암튼 이것도 역시 미소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마땅히 받아들이길 바라는 의식의 산물이다. 






앞쪽은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 많아서 페이퍼를 남기지 못했는데 4장 '아동기를 없애자' 부터 너무 재밌다. 





 

  





남성의 자율성은 인간이 조건이지만, 여성의 자율성은 불가능하거나 이기성으로 간주된다. 이성애 제도와 가족제도가 결합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평생토록 치열하고 소진되는 협상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고, 이것이 인간의 인생이다. 민족주의부터 마르크스주의까지 다양한 남성 연대는 이를 주조하는 틀이다. -수치. 조애나 버트



  

  

   




"차 험하게 모시네요." 나는 항의했다. "좀 조심하든가 아니면 아예 몰지 마세요."

"조심하고 있어요." 

"당신이? 아닌데요."

"나 말고요. 다른 사람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다른 사람들이 비킬 거라는 거죠." 그녀가 우겼다. " 사고가 나려면 최소한 둘이 있어야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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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16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바지 벗기고 엉덩이요? 늙은 남자가 미성년자를? 와 진짜 제가 눈앞에서 두드려 패고 싶네요. 아 증말 ㅠㅠ
저도 파이어스톤 열심히 읽고 따라갈게요. 수치 도 준비해 두었는데 미미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저 스무살 때 성추행 당하고도 웃었던 생각이 나 괴롭습니다. 전 아직도 그 일로 절 자책해요.

미미 2023-07-16 10:06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 사법부 수준이 참...ㅠㅠ 10초가 생각보다 길다는 걸 SNS시위가 보여주고 있다네요.
수치는 정희진 쌤 해제만 읽어봤어요. 좋은 책들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요즘입니다. 다락방님 저는 초등학교 때 눈앞에서 일어난 폭력에 아무것도 못하고 얼어버렸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죄책감과 함께 남아있습니다. 자책하지 않으셨음 좋겠어요.저도 그러려고 애씁니다.

페넬로페 2023-07-1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참 남의 일에 관심이 많죠.
시간이 많은가봐요 ㅎㅎ

10초!
도대체 그렇게 생각한 판사, 정말 기가 찹니다 ㅠㅠ

미미 2023-07-16 20:35   좋아요 1 | URL
이 친구가 발이 넓은 탓도 있긴한데
모른척해주는 미덕도 필요하다고 느꼈어요ㅎㅎ

한번씩 우리나라가 범죄자에 관대하다지만
저런 판결...한국에선 앞으로도 없겠죠? ^^

책읽는나무 2023-07-16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초!!!
판사가 거꾸로 당해본다면 10초 이상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자 10초 지났다. 신고해야지!!!!
그럴려나요??

미미 2023-07-16 20:40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처음 지상파 뉴스에서 보고 믿기지 않아
뉴스 기사를 다시 찾아봤어요.
이탈리아에 이런 보수적인 정서가 있었나? 싶고.
시민들이 침묵하지 않고 저렇게 대응하는 건 다행인데
피해자는 얼마나 황당할지... 이건 판사가 2차가해 하는 거죠.


독서괭 2023-07-20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초 그 건 대박이죠.. 황당무계. 이탈리아도 참 어디로 가는건지..
미미님 친구분 힘드셨을텐데, 좋은 방법을 찾아내셨네요! 웃지 않는 건 어려우니 ㅋㅋ ˝정말 궁금해요?˝라고 묻는 건 생각 못했는데, 괜찮네요. 예전에 김영민 교수의 <추석이란 무엇인가> 그 글도 떠오릅니다. 직장이란 무엇인가? 출근이란 무엇인가?^^

미미 2023-07-20 19:20   좋아요 1 | URL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캣 콜링이 가장 심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납니다.
저런 상황에서 웃지 않는 거 정말 어렵죠. 형식적인 것들, 겉치레,...이런 것들이 의외로 많네요.

저 그 대목 읽었어요! 제목은 무겁지만 내용은 의외로 재밌던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