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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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이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은 죄다 세상일이고 그래서 안 보이는 데로 치워 버리면 그만이라는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저 여자는 언제 어디서나 저렇게 말하겠지. 제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그 자식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또 그렇게 말하게 되겠지. 그런 식으로 세상일이라고 멀리 치워 버릴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둘씩 만들어지는 거겠지. 한두 사람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가 만들어지는 거겠지. 127



허름한 2층을 내어주고 매달 받는 월세와 요양보호사 일로 겨우 혼자서 살아가는 엄마에게는 동성 연인이 있는 딸이 있다. 갑자기 대출을 좀 받아 달라는 딸에게 차라리 얼마간 집에 들어와 살라고 말하자 하필 그 애도 딸과 함께 짐을 싸 들어온다. 두 사람에게 미리 받은 월세를 급한데 쓰게 되니 같이 사는 게 못마땅하고 이웃들이 눈치챌까 불편해도 속 시원히 따지지 못한다. 병원에서 엄마가 담당하는 '젠'이라는 여성은 결혼도 하지 않고 젊었을 때 사회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 유명했었는데 이제 늙고 병들어 아무도 찾지 않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런 '젠'의 모습은 세상에 쓸모 없어진 자신(엄마)의 처지를 나타내기도 하고 기댈 곳 없이 쓸쓸히 혼자 남을 딸아이의 미래인 것도 같다. 




시간 강사로 보따리를 들고 전국 대학을 떠돌며 일하는 딸은 부당한 일을 보고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엄마는 그런 딸이 답답하고 속이 상한다. 왜 결혼도 하지 않고 여자와 살며 이제는 남의 일에 스스로 휘말려 위험을 무릅쓰는지. '어쩌면 딸애는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엄마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상과 불화하는 법.' 그러나 병원측에서 '젠'을 성가신 존재로 여기자 엄마의 '잔잔하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일렁이기' 시작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숙명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쩌면 이해받으려는-욕구와 고집은 거기서 비롯되는 걸지도...




권력의 횡포보다 두렵고 힘 빠지는 것은 들어주긴커녕 시끄러우니 말하지 말라고. 소용없다고 옆에서 쏘아보는 사람들이다. 너는 말할 권리가 없다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네가 한가하니 그딴 소리를 하는 거라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하지도 못하고 있는데...그건 누구도, 아니 어쩌면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누가 뭘 견디고 사는지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 수면 위의 떠오른 모습 만으로 남을 재단하는 사람들. 쓴 약을 삼키듯 보고도 모른척하면 정말 모르는 줄 아는 사람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 나에게 그런다면? 소설 속 엄마는 자신이 참지 못하고 딸에게 쏟아붓는 말이 스스로도 들어왔던 가시 돋친 말이었음을, 부정의의 언어였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쉽지 않은 공감의 틈이 열리면서 '그 애'는 '우리'로, 완벽한 순간에 꼭 필요한 존재로 함께 하고 있다. 어느새 그들이 불화했던 이유는 그들이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내뱉을 수 없는 말들, 결코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말들. 내부에 남은 말들이 덜그럭거리고 부딪히며 상처를 내는 것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또 한편으로 그런 말을 할 때 나는 어떤 위로를 받는 것도 같다. 그 순간에는 이 모든 일들이 아주 멀리 있는 일이 아니고 내가 그 모든 일의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내가 무너지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184




누군가 나에게 딱하다는 듯이 말했었다. 이걸 다 혼자서 책임질 수는 없는 거라고. 그때 대답을 했었는지 나중에 혼자 생각한 답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내 주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돕고 싶은 거예요.' 나는 지구를 구할 생각이 없다. 나는 내가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방관자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작은 관심들, 하나하나는 보잘것없는. 그러나 그런 목소리들이 모여 외면하기 힘든 소리가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저 바람 한 점, 메아리로 남더라도. 냉정하고 매섭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시끄럽고 하찮을지라도. 의식 있는 구성원 중 하나로, 사는 동안에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저 사람들은 감정이라 할 만한 것들을 모두 집에 두고 오는 것 같다. 맺고 끊고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고, 아직은 그런 일들이 척척 수월하게 되는 탓일지도 모른다. 58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엄마의 입장이 되었다가 딸의 입장이 되고 '그 애'의 입장이, '젠'의 입장이 되어있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그러한 경험 속에서 내가 선명해지는 과정인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을 읽다 보면 각각의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사고방식이 드러나고. 이야기에 빠져들며 도망갈 틈 없이 흰 종이 위 검은 글자처럼 나의 생각이, 주관이 선명해진다. 그 과정은 영화 '메타모르포제의 툇마루' 속 우라라의 말처럼 유쾌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어떤 생각들을 정리할 때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자극은 앞으로 나아갈,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더 나이 들기 전까지, 감정조차 메마르고 주름지기 전까지. 그런 노력을 계속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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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9-11 1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는다는 건 내가 선명해지는 과정이라는 말, 좋네요. 그리고 맞네요. 소설을 읽고 설사 내 스스로에게 변화가 일어난다해도, 그조차도 내가 더 선명해지는 일일테니까요. 나를 좀 더 들여다보고 나를 좀 더 알게 되는 일, 그게 선명해지는 거잖아요. 내가 선명해지는 일은, 내가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소설 속 문장들이 그리고 이야기들이 표현해주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툇마루 보셨군요! >.<

미미 2023-09-11 14:46   좋아요 1 | URL
네! >.< 이 소설을 읽고나서 제 공감력이 ‘말할 수 없음‘에서 비롯되었구나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이는구나 깨달았어요. 이 소설 읽다가 울고 ‘툇마루‘보다가도 여기저기서 울고..감동이었습니다. 사진도 여러장 모아둠요. 예쁜 영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다락방님!!

자목련 2023-09-11 16: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혜진의 이 소설 참 좋은데, 미미 님의 리뷰는 더 좋습니다!

미미 2023-09-11 17:18   좋아요 0 | URL
김혜진의 문장들이 워낙 좋아서 좋아 보인것 같습니다.^^ 그의 다른 소설도 다 읽어보고 싶어요!

자목련 2023-09-13 20:10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김혜진의 다른 소설도 다 추천해요!!

페넬로페 2023-09-11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며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도 잘 표현했나 감탄하며 읽었어요.
세상 사람들에게 다 열린 마음이지만 막상 내 앞에 이런 상황이 있다면 나 역시 당황스럽고 힘들거라는 생각도 해봤어요.
이 책 전에 독서동아리에서 읽었는데 외동딸을 둔 어떤 회원분이 혼자 남겨질 딸아이가 동성애도 좋으니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누군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거 기억이 나요!

미미 2023-09-11 17:25   좋아요 1 | URL
엄마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며 정신없이 읽었어요. 저는 어떤 딸일까 생각하며 미안해지기도 하더군요. 기대한것 이상이었습니다. 그 회원분의 말씀도 뭉클하네요.ㅠㅠ 박완서 쌤 아들에 대한 일화도 생각나고요!

새파랑 2023-09-11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설을 좋아하는게 다양한 체험을 간접경험할수 있어서인거 같아요~!!

가장 가까운게 가족인데 가족끼리 공감이 쉽지만은 않은거 같습니다 ㅎㅎ

미미 2023-09-11 20:14   좋아요 1 | URL
저도 마찬가지예요!! ㅋㅋㅋㅋ 마음 다치지 않고 사람을 만나는 방법이 되기도 하고요.

네~가족이라도 또는 가족이라서 더 어려운 지점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을 잘 묘사한
소설이어서 좋았습니다. 여러모로 위로가 되는 작품이었어요.

독서괭 2023-09-11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좋지요! 엄마 시점으로 해서 더 와닿더라고요. 늙음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하고… 미미님의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미미 2023-09-11 20:18   좋아요 1 | URL
네!! 지난번에 읽은 <너라는 생활>도 좋았는데 이번 소설을 더 와닿았어요. 저도 이제 나이들어가니
늙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길에서 노인분들 뵈면 짠하고요. 괜히 더 마음 쓰여요. 노인복지도 더 나빠지는 것 같고요. 읽어봐 주셔서 감사해요 괭님!

바람돌이 2023-09-11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다락방님이 쓰신 <너라는 생활>도 읽고 싶었는데 미미님의 이 글을 읽으니 정말 읽고싶은 작가가 되네요.
여러분들에게 추천받아 읽었던 이주혜 작가도 좋았는데 김혜진 작가님도 조만간 만나러 가겠습니다. ^^
저는 저 툇마루 만화로 읽었는데 좋더라구요. 영화도 찾아보고싶네요.

미미 2023-09-11 23:28   좋아요 1 | URL
툇마루 만화 1권 저도 담아두었어요! 영화가 인상적이어서 만화도 궁금해요. 바람돌이님 좋으셨다니 더 기대가됩니다. ^^

책읽는나무 2023-09-12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를 맨처음 읽었었는데 범상치 않다!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엄마와 딸의 입장에서 왔다 갔다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나중엔 거의 엄마의 입장에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구요.
<9번의 일> 소설도 좀 생각거리가 많았어요. <경청>두요. 리뷰 읽으니 두 소설들의 미미 님 리뷰도 읽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ㅋㅋㅋ
툇마루 만화도 좋다던데...영화도 있었군요.^^

미미 2023-09-13 13:11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나무님도 이 작가 좋아한다고 하시고 그레이스님도 추천하셔서 읽어봤어요.
이 소설 읽으면서 저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정화된 느낌이었어요ㅋㅋㅋㅋ
<9번의 일>,<경청>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툇마루 영화 좋았어요^^

2023-09-13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9-13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3-09-14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미에 적어 주신 그러니까
왜 우리가 문학을 읽는가에 대한
선명한 애리~튜드가 와 닿았습니다.

결국 읽는 것이 우리를 그리고 우
리의 주관을 맹그는 게 아니겠습니
까 고저.

미미 2023-09-14 11:19   좋아요 1 | URL
네!ㅋㅋㅋ그러므로 더 즐겁게 읽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

자기 생각을 가진 다는건
정신이 건강해지는 길이니 회복되어지는 과정이니까요.

페크pek0501 2023-09-15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 님, 이 리뷰 참 좋네요. 리뷰 덕분에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리뷰 중 중요한 말씀이 눈에 띄네요. -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돕는다는 것, 지구를 구하겠다는 게 아니라는 것.
좋은 말씀입니다. 그냥 각자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지요. 남을 도울 때도 자기가 도울 수 있는 만큼만 도으면 되는 거지요. 거창한 게 아니고.
그런 사람 하나하나가 모이면 큰 덩어리가 되는 거지요...^^

미미 2023-09-16 12:32   좋아요 1 | URL
김혜진님의 글이 워낙 좋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분들도 있고 할 수 있는 자잘한 실천들을 쌓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죠. 페크님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3-09-22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았던 책입니다.
독서는 불편하게 영상은 편하게가 제 스타일이라서...^^

미미 2023-09-22 22:54   좋아요 1 | URL
네ㅎㅎ 지난번 그레이스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어봤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