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들보다 이미 죽은 이들이 더 복되다 하였으며, 그러나 그들 모두보다 태어난 적이 없는이, 그리하여 태양 아래 범해진 사악한 일들을 보지 못한 이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ㅡ전도서 4:2ㅡ3 P.277
팬데믹을 거치며 인간이란 종족이 지구에 해를 입히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거라 생각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속담이 무색할 만큼 팬데믹, 기후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이 촉발한 에너지와 식량위기등 전 세계인이 함께 목도하는 난제들이 지금 한 두가지가 아니다. 특히 계층 간의 분열과 갈등을 극대화하는 국내 정치상황은 확실히 '살맛나는 세상'과 거리가 있어보인다. 마침 이럴때 이 책을 읽어 한편으로는 심증에 논리적인 확증이 더해진 기분이라 위로가 되고 한편으론 답답함도 더해졌다. 답답함은 오늘 공기 탓인 것도 같아 미세먼지 정보를 찾아보니 WHO 기준 권고치 초과라고 나온다. 요즘은 US기준으로 이런 상황도 빨강이 아닌 초록으로 표시된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이런 방식이 먹힌다는 게 씁쓸하다. 이렇듯 우리는 심리적, 환경적 이중 고통 속에 놓여있다.
넷플릭스 <러브,데스,로봇> 시즌 3에 '아이스 에이지'란 이야기가 있다. 한 커플이 새로 이사한 집에서 헌 냉장고를 발견한다. 냉동실을 열어보니 오래된 성에 사이로 인류를 닮은 미니어처가 그 안에 있고 문명의 시작과 끝이 빠른 화면처럼 그 안에서 진행되는 걸 볼 수 있었다. 실제 역사와 닮아 있어서 과거로부터 현대로 이어지자 이들은 감격한다.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미래까지 이어지는데 그러나 그 결과는 전쟁으로 인한 인류 절멸이었다.
최재천 교수에 따르면 몇십 년 전부터 WHO와 FAO가 후진국들에 가서 설명하고 피임법들을 교육시킨 결과 전 세계적으로 출생률은 이미 낮아지기 시작했지만 인구증가율은 낮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모집단 규모 자체가 너무나 커져버렸기 때문. 10억에서 20억 인구가 되기까지 약 100년이 소요되었다면 60억에서 70억으로 느는데 약 12년 밖에 안 걸렸다. 전체 규모가 큰 상태이므로 인구증가율의 기간은 점점 짧아지는 것이다. 즉 10억에서 사람이 느는 것과 70억에서 사람이 느는 규모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섬에 아무도 사는 이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만일 존재했더라면 그 섬에 거주했을 행복한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화성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그들이 향유할 수 없었던 삶에 관해 그런 잠재적인 존재를 위해 유감으로 생각하며 애석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할 수도 있었던 이들의 고통은 유감스러워하지만 부재하는 쾌락을 유감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p.64
인류의 역사와 그 해악을 인간의 입장이 아닌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슬프게도 답은 더욱 명확하다.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생각할 필요도 없게끔 그저 낳는 것이 기본값인 것처럼 유도하는 이 전 지구적 힘은 어디에 그 원천이 있을까? 농경사회나 산업 부흥의 필요에 의한 이유뿐일까? 나는 농경사회 이후로는 자본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었을 거라 짐작한다. 자본주의의는 이익을 위해 수많은 소비재를 생산해야 했고 그걸 위해서는 그걸 만들어낼 인력과 그걸 구매할 인력이 필요했다. 인류 문영은 더 편리함과 풍족을 과거에 비해 이루었음에도 끊임없이 이익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과 여기에 구조적으로 얽힌 사람들로 인해 벗어나기 힘든 자본축적의 굴레안에 들어서 있다. 때문에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더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만큼 소비해야 한다. 낙천주의 성향(낙천편향)은 그 근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에 맞물려 사람들의 기본 정서로 자리 잡아 이 시스템을 유지시킨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태어날 수밖에 없다면,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우리가 왔던 곳으로 재빨리 돌아가는 것이다.
젊은이가 그 모든 어리석음과 함께 세상을 떠날 때
누가 악 아래에서 비틀거리지 않는가? 누가 그 악에서 탈출하는가? ㅡ 소포클레스 p.41
사람들이 그렇다고들 하니까 그저 별생각 없이 나도 거기 동의했던 일들을 생각한다. 미심쩍을 때도 많았지만 그냥 그렇다니까 나도 그렇다고 하는 게 편했고 소속감을 주었던 것도 같다. 다른 생각을 갖는다는 건 내 삶의 옵션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라는 경외심 섞인 반감이 들기도 했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인처럼 살았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좀 더 명확하게 고민했다면, 미심쩍은 것들을 파고들었다면 그런 시간이 훨씬 줄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있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당연한 것들에 의문을 갖는 방법을 뒤늦게나마 알았다. 그리고 의문을 가져야만 하는 것들이 꽤 많다는 사실도 따라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의심없이 부여받은 낙천주의 성향에 대해 의문을 갖게된다. 그리고 세상이 많은 불행한 일들과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거기에서 완전히 예외인 사람은 ㅡ누구나 동의하겠지만ㅡ 거의 없다. 그 사람의 부나 사회적 지위, 계층에 상관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제각각의 수많은 난관에 어떤 식으로든 매번 부딪히게 되니까. 데이비드 베너타는 그 정도와 대응 방식에 상관없이 쾌락과 고통으로 분류했을때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논증한다. 서론에서 상당히 명쾌하게 핵심을 전달하는데 가능한 여러 반박에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느라 일부 내용이 꽤 어렵게 느껴졌다. 흥미가 있다면 서론이라도 읽어보고 가능하다면 저자가 말하는 주요 파트를 추가로 읽어보는게 도움이 된다. 늘 그렇듯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쇼펜하우어의 견해에 의하면 삶이란 갈구하고 의지하는 끊임없는 상태, 즉 불만족의 끊임없는 상태이다. 자신이 갈구하는 것을 얻는 일은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주지만 어떤 새 욕구를 곧 낳는다. 갈구가 끝이 난다면 그 결과는 지루함, 즉 다른 종류의 불만족(dissatisfaction)일 것이다. 갈구(striving)는 삶의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는 살기를 멈출 때야 비로소 갈구하기를 멈춘다. p.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