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작가와 그의 작품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미로를, 목적지와 출발지가 구별되지 않는 긴 순환로를 함께 걷는다. 그 길은 바로 고독이다.p.15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달간 독후감을 쓰지 못했다. 2년 가까이 꾸준히 써오던 독후감인데 한 달이라는 공백은 '쓰기' 보다는 '쓰지 않기'에 적응하게 만들었다. 쓰고 싶지만 쓰고 싶지 않은 이중적 상태. 만일 전업작가에게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어떨까? 쓰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쓰지 못함은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하는 고뇌만큼이나 고통스런 무엇이지 않을까? 마침 그 작가가 첫 작품으로 문학계를 뒤흔들어 흑인랭보라는 찬사까지 들었으나 표절논란등 각종 스캔들에 휘말려 자취를 감춰버렸다면? 그리고 해당 출판사가 그로인한 법적 소송으로 문을 닫았다면? 이후 그 작품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의견을 표출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목숨을 잃어갔다.
진정한 작가는 진정한 독자들 사이에 목숨 건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진정한 독자들은 그래서 항상 전쟁 중이지. 부즈카시*에서처럼 엘리만의 시체를 빼앗기 위해 경기장에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당장 꺼지는 게 나아. 가서 자기 오줌이 맛있는 맥주라 생각하고 허우적대다 죽어버리라지. 그런 인간은 딴 건 몰라도 독자는 될 수 없어. 작가는 더더욱 안 되고. p.18 (*말을 타고 죽은 염소를 빼앗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전통 경기)
1938년 T.C.엘리만이라는 세네갈 출신 작가가 '비인간적인것의 미로'라는 책을 출간한뒤 프랑스 문학계가 들썩인다. 백인이 주류인 문학계에서 흑인 작가의 두각은 추앙과 동시에 질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카루스와 같은 화려한 비상도 잠시, 여러 소설을 표절했다느니, 아프리카 특정 부족의 신화를 그대로 베꼈다느니 논란이 이어졌고 엘리만은 곧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수십년 후. 디에간이라는 역시 세네갈 출신의 신예 작가는 자신의 그저그런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완벽한 소설을 남기고 사라졌던 엘리만의 베일에 쌓였던 삶과 비밀에 다가가게 된다. 이 소설은 '위대한 작품'을 쓰고 싶은 디에간이 먼저 그런 소설을 쓰고 주목을 받다 한순간에 추락해 문학계에서 사라진 엘리만의 흔적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동시에 식민화된 나라의 존재라는 슬픔을 안고 피정복지(본국)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이 조국에 대한 배신인지 아닌지에 대한 혼란과 고통도 다룬다. 특히 그것을 문학의 의미, 글쓰기를 활용한 존재의 증명으로 확장시키는 점이 놀랍고 흥미로웠다.
식민지화는 피식민자들에게 황폐와 죽음과 혼돈을 심어.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건ㅡ식민지화가 이루는 가장 악마적인 성공은ㅡ바로 자신들을 파괴하는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는 거야.p.496
문학계에서 별이 되었다가 사라진 작가 엘리만. 그의 부모세대로부터 시작된 비극은 '비인간적인것의 미로'라는 작품에 어떤 식으로든 투영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타인들의 비평으로 말미암아 비극을 이어받게된다. 글을 쓴다는것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희진이 말하듯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생각,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를 잊기 위한 글 쓰기는 오히려 과거를 마주하게 하고 고통과 쓰디쓴 재회를 해야만 가능하다. 문제의 소설'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에는 네로 왕처럼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잔혹한 왕이 나오는데 그렇듯 죽이고 죽여도 과거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완벽한 작품을 쓰겠다는 욕망역시 마찬가지다. 이전 것을 아무리 지우고 배제하고 죽인다고 해도 과거의 유령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만이 남는다. 그런 전제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말이다. 이 질문은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