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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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똑똑히 들어요. 순수함에 대해서 경계하십시오. 그건 영혼의 황산염 같은 것입니다."



바다 위. 버지니아호 선장이 로빈슨에게 타로점을 봐주고 이런 경고를 한다. 타로카드에 나타난 결과는 불길하면서도 어딘지 전복적이었다. 죽음을 의미하면서도 부활을 예고했던 것. 타로점의 기이한 힘 때문이었을까? 마치 발설해선 안되는 비밀을 내뱉어 심판받듯 배는 이 말이 끝나자마자 풍랑에 휩싸이고 선장은 고꾸라진다. 난파된 배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로빈슨은 작은 무인도에서 눈을 뜬다. 슬픔수용단계에는 보통 4단계로 나뉘는데 부정,분노,타협,우울및 수용이 그것이다. 로빈슨의 여정은 마치 이 절차를 밟아가는 것만 같다. 처음에는 머지 않아 자신이 구조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섬 한곳에 난파된 배의 일부. 그 안에 식량이 있었지만 그래서 탐내지 않았다. 그것들을 섭취하면 이 섬에 영영 발이 묶일것만 같다는 미신적인 불안감도 있었다. 하루하루 되는대로 버틴다. 열매를 따먹고 조개를 줍고 염소를 잡아 배를 채웠다. 날짜도 새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한달이, 몇년,수십년이 흘러간다. 



그 바다는 그를 더럽히고 나서 광기의 심연 속에 밀어 던지는 것이었다. 죽지 않으려면 그것에서 헤어날 수 있는 힘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섬은 그의 등 뒤에 제한된 약속들과 준엄한 교훈들로 가득 찬 채 광대하고 순수하게 펼쳐져 있었다. P.53


누구도 만날 수 없는 곳 무인도에서 고립된 채 시간의 개념마저 아득해지자 로빈슨은 비인간화되어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전 삶이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었기에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임을 비로소 실감한다. 철학적인 깨달음이 무서운 고요 속에서 유일하게 그의 의식속에 타오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육신은 점점 더 진창속에 빠져든다. 나오려고 발버둥칠 의미조차 상실한 그에게는 오히려 진창이 위안이 되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섬의 중심에 있는 동굴안에서 운명처럼 각성에 이르게 된다. 희미한 과거의 기억속에 남은 로빈슨의 어머니, 다정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이해했던 어머니. 그녀의 자궁을 상징하는 동굴안에서 그는 다시한번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다시 태어난 그는 이 섬에서 자신의 왕국을 실현하려 한다. 농사를 짖고 새롭게 시작된 자신의 새 날들을 기록한다. 글이 지워져버린 책들에 잉크를 만들어 독수리 날개로 문서도 작성하고 헌장과 법전도 만들고 급기야 자신이 만들어낸 그 문서들에 주석도 단다. 곡식이 채워지고 나중을 위해 절재하는 삶이 이어지고 관습과 규제가 늘어난다. 


인간은 저마다 내부에 ㅡ그리고 그의 외부에ㅡ습관 반응, 반사 작용, 메커니즘, 골몰한 생각, 꿈 등으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깨어지기 쉬운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의 동류들과 항구적인 접촉을 통하여 형성되고 계속 변모한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알겠다 수액이 없어지면 이 섬세한 화초는 잎이 떨어지고 시들어버린다. 내 세계의 중요한 부품인 타인....(...)인물들은 척도를 제공한다. 그 인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상자의 실제적인 관점에다가 필수 불가결한 잠재성을 추가하는 가능적인 관점들을 형성한다.P.66


'스페란차'라 스스로 명명한 이 섬에 로빈슨이 자신의 의지를 불어넣던 어느날. 섬에 들어온 원시부족이 인간 재물을 바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들은 그렇게 정기적으로 스페란차에 들어와 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한번은 뜻밖에도 두 명의 재물을 바치려했고 갑작스러웠기 때문인지 두 번째로 지목된 자가 놀라 도망친다. 어찌하다보니 그 인간재물을 로빈슨이 총을 쏴 돕게된다. 부족들은 도망치고 재물로 타버릴 뻔한 어린 소년은 로빈슨의 노예가 된다. 이 노예의 이름이 방드르디(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프라이데이'처럼 방드르디도 금요일이란 의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도 금요일이다.)다. 방드르디는 자기 목숨을 구해준 로빈슨의 발밑에 무릎꿇고 주인으로 받들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로빈슨의 규율을 깨트리기 시작한다. 이 후 두 사람에게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인 미셸 투르니에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소설 방드르디 에서 로빈슨의 모습은 인류의 문명과 참 많이 닮았다. 스스로 신이 되어 문명을 건설하고 나와 다른 타자를 착취하고 규율속에 가둔다. 강압과 주입은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는 방식이고 노예는 자신을 지우고 주인을 따라야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문명이 보여주듯 모든 주체는 자신만의 방식을 추구하길 본능적으로 갈구하며 이로인해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장기간의 고독을 통해 로빈슨은 자신안에 전복을 갈구하는 그 무엇을 축적했던 것일까? 스스로 질서를 세우려 했지만 그것을 무너뜨리고자하는 욕망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던 그는 결국 인류의 그것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된다. 그렇다면 에초에 난파된 배에서 홀로 살아남아 무인도에 안착한것은 로빈슨에게 행운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이야기 속 극단의 상황은 삶의 근원적 물음으로 우리를 이끌어주기에 더욱 매력적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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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9-23 1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이었어요? 스스로 만든 질서를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궁금해집니다. 방드르니의 용어 정의, 인류의 문명과 겹쳐지는 점이 보이는걸요. 흥미로워서 찜해놔야겠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어느 곳에서든 상하관계가 생기는 이유를 요즘 들어 새삼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청아 2022-09-23 13:51   좋아요 4 | URL
이웃이신 청년님이 추천해주셔서 읽었는데 철학책을 읽은 느낌이예요. 저자인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건데 그 책을 읽지 않았기에 나중에 그것도 읽어보고싶어졌어요.
방드르디가 혼혈흑인남자아이로 나오는데 여성이었으면 또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ㅎㅎ
페미니즘을 공부하니 저도 계급을 늘 고려하게 되는것 같아요.^^*

scott 2022-09-23 14: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드니에가 수도사였지만 철학박사로 젊은 시절 프랑스 중고등 철학교사였습니다
이분 책 대부분 인생의 고난의시기에 인간이 어떻게 헤쳐나갈수 있는 지 지혜와 해답을 찾는 여정 인간 내면속 자아를 찾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프랑스 고등 교과서에도 수록되어있고
한때 바칼로레아 출제 된적도😊

청아 2022-09-23 14:51   좋아요 3 | URL
최근에 읽은<뒷모습>의 글도 좋았는데 이 소설은 심오한 주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놓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건 알았는데
중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군요?!!
바칼로레아라면 혹시 영화 ‘유콜잇러브‘에서의 그
구술시험이 포함된 시험 말씀이신가요?🤔

scott 2022-09-23 15:45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프랑스 고딩들(한국에서 2학년 쯤) 철학 과목이 필수 여서 이분의 책을 필독 ㅎㅎㅎ
영화 ‘유콜잇러브‘에서 여주가 본 시험도 구술
바칼로레아 인데
아마도 고등연구학위과정 평가 시험(이거 통과 하면 철학 교수 자격증 따고 자신이 원하는 어떤 교육기관에서 학생을 가르칠 수 있음/학자의 길로 가려면 기나긴 논문의 터널을 통과 해야 함 ) 인데

미미님 역쉬!
프랑스에 진심 ^^💖


미셸 투르드니에의 <예찬>과 <외면일기>
추천 합니다
가을에 읽기 좋아여 ^^


청아 2022-09-23 15:53   좋아요 2 | URL
오 스콧님 추천!!
꼭 읽어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2-09-23 14: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로빈슨 크루소보다 훨씬 좋을거 같은데요.
로빈슨이 세운 질서와 무너뜨리고자 하는 욕망이 뭔지 알고 싶어서 이 책 담아갑니다. ^^

청아 2022-09-23 14:39   좋아요 4 | URL
그런가요? ^^* 무인도 서사는 워낙 영화로도 종종 접해서 그런지 방드르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금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요. 그래도 철학적 내용들이 흥미로워서
한번에 쭉 읽긴 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전에 사두었는데 은근 두껍더라구요(466쪽)
미리 그 책을 읽었다면 비교가 되었을테고 차이점을 분명히
소개했을거란 아쉬움이 조금 있어요

다락방 2022-09-23 14: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십년도 더 훨씬 전에 친구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았었어요. 아주 좋은 책이라고 선물 받아 당장 읽기 시작했는데 오십페이지도 못가 포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뒤로 책장에 내내 꽂아두기만 했거든요. 당시에는 너무 지루하고 못읽겠더라고요. 그런데 오늘 미미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세상 철학적일 것 같고 좋은데요? 이제 드디어 이 책과 제가 만날 때가 됐는가 봅니다.

청아 2022-09-23 14:47   좋아요 4 | URL
다락방님 이 책 갖고 계시군요! 더구나 선물받으셨다니 그분이 어떤 분일지
아마도 철학에 대해 나름의 관점을 가진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에게는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4부작이 그랬는데요. 요즘 오디오북과
드라마로 한창 빠져있어요!!

막 재밌지는 않지만 철학책이다 생각하시면 잘 읽어지실것도 같아요ㅋㅋㅋ
다락방님 다시한번 미셸 투르니에의 세계로!^^*

얄라알라 2022-10-02 01:0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께서 읽다가 중단하셨다니, ^^ 선물해주신 분 쎈스가 엄청나시군요^^ 다락방님을 많이 사랑하는 분일 거라는 느낌.

저도 사실, 이 책 최초엔 선물받아 읽었는데^^ 꼭 만나보세요. 강추합니다!

새파랑 2022-09-23 15: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많이 읽어본 느낌이 들었었는데 <로빈슨 크루소> 였군요 ㅋ 뭔가 미미님처럼 심오함이 느껴집니다~!!

청아 2022-09-23 15:49   좋아요 4 | URL
그쵸!!ㅋㅋㅋ저 처음에 갖고있는 정보가 전혀 없어서 연결못짖다가 이름에서 혹시?했는데 나중에 성까지 나와서 그 스토리구나 했어요ㅋ 미셸 투르니에라는 작가가 원작을 바탕으로 새롭게 쓴거예요^^*

독서괭 2022-09-23 18: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예전에 읽고 미셸 투르니에 <생각의 거울>이랑 <예찬>도 읽었던 것 같아요. 기억에 방드르디는 어려웠지만^^; 로빈슨크루소보다는 훨 문학적이고 진실한(?) 느낌.. 특히 프라이데이와의 관계에서 차이가 크지요! 미미님 리뷰 잘 읽고 갑니당~^^

청아 2022-09-23 19:00   좋아요 6 | URL
괭님은 두 소설을 모두 읽어보셨군요?!! 다 읽어보신 괭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원작보다 확실히 깊이가 있나봅니다.^^*
저도 미셸 투르니에의 다른 책들 꼭 읽어봐야겠어요~♡

mini74 2022-09-23 20: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예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 어렵다란 기억, 크루소가 감춰둔 더러운 진실같단 느낌 ㅎㅎ 미미님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뭔가 눈 뜬 거 같아요 ㅎㅎ

2022-09-23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eagene 2022-09-23 23: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미미님이 리뷰를 쓰시니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네요!
전 이 책 한20년전쯤 한번 읽어보려고 시도했는데 초반 읽다가 포기했어요.영 지루하고 진도가 나가질 않아서 못 읽겠더라구요ㅎㅎ
그래도 미미님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주시니 무슨 내용인지는 알겠네요.읽다만 책,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청아 2022-09-24 08:42   좋아요 5 | URL
예진님 다르게 느껴지셨다니 감사해요^^*
20년전쯤이면 꽤 오래되었네요? 저도 20년전에는 못읽었을것 같아요ㅋㅋㅋ 이곳은
서로 책의 재발견을 도울 수 있으니 너무너무 좋지요~^^♡

그레이스 2022-09-24 10: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로빈슨 크루소 변주한 책들 중 탁월하죠?
저도 인상깊었던 책입니다.
이 책이 문화적, 인종적 타자 이야기라면, 쿳시의 포(Foe)는 여성의 입장에서 썼어요, 읽어봤는데 번역을 장담 못하겠네요.
암튼 투르니에의 시선은 제게 너무 좋았습니다.
나아가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를 읽게 되었죠^

청아 2022-09-24 10:31   좋아요 4 | URL
아 저는 아직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않은 상태라서요.^^* 어떤 차이가 있는건지 디포의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요. 여성의 입장이라니 넘 반가워서 찾아봤는데 존 쿳시의 포가 아쉽게도 절판이네요.🥲

페넬로페 2022-09-24 22: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계속해서 읽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과도 어느 정도 통하고 있어요. 문명의 우위로 인간을 착취하는 과정은 어느 시대에나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래전에 이 책 구매했었는데 안 읽어 중간에 처분했는데 후회가 됩니다^^

청아 2022-09-24 17:17   좋아요 4 | URL
<바닷가에서>지난번 페넬로페님 리뷰읽고 최근에 준비해뒀습니다^^*
물질문명과 자본의 힘이 워낙 강력해서 이런 책들이 주는 메시지가 더 의미있고 소중하게 느껴지는것 같아요.

scott 2022-09-24 22:55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구르나!
인생이 이 작품 속 상황과 맞물리네요!^^

역쉬 페넬로페님 숨은 고수 이쉼 👍👍👍

얄라알라 2022-10-02 0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의 신들린 문장력이 돋보이는 리뷰,
소설 잘 모르는 저이지만 [방드르디, ~~]는 제 인생 소설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아끼는 꿀단지 같은 소설을 요렇게 상기시켜주시니~ 연휴의 야밤에 행복합니다

청아 2022-10-02 08:57   좋아요 3 | URL
얄라님의 인생소설이었군요!!!
저는 이번에야 추천받아 알게된 책인데 의외로 여러분들이 읽었다고 하셔서 놀랐거든요. 얄라님 인생소설이라 하시니 공감됩니다. 나중에 다시한번 읽고싶은 책이예요.ㅎㅎ
남은 연휴도 행복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