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이 감옥이라니 말도 안 돼!> 트레비소로부터 몬테비소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과 알프스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봉우리들, 눈에 덮인 산꼭대기, 그리고 별들, 이런 것들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더구나 이 밤이 내가 감옥에서 지내는 첫날밤이라니! (중략)<만약 저 창문 아래 있는 새들이 그녀의 것이라면 그녀를 볼 수 있겠구나… 나를 알아보면 그녀는 얼굴을 붉힐까?> - P84
19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뛰어난 외모와 숭고한 마음을 지녔으나 어리석기 그지없는 한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델 동고 가문의 둘째아들 파브리스다. 파브리스가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하고 허영심에 가득한 대책없는 청년인지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불안한 마음을 수없이 진정시키며 글을 읽어나가야 한다. 그는 어느날 갑작스럽게 나폴레옹의 전쟁을 돕기위해 집을 나선다. 그의 고지식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와 그를 무척 사랑하는 고모는 가지고있던 보석과 돈을 모두 그에게 내어줄만큼 파브리스를 애지중지한다. 당연히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아 가까스로 도착한 워털루전쟁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별의별 일들을 겪는다. 그리고 당시는 유럽의 국경을 이동하는 일이 번거롭기 그지없었는데 신분을 위장했던 것이 그만 오해를 사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사리분별력도 떨어지고 순진하기 이를데없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개인사를 다 털어놓질 않나 쉽게 사람을 믿어 큰 돈을 잃기도하고 뒤를 생각하지 않아 순간적인 감정으로 가진 돈을 마구 내놓기도 한다. 게다가 프랑스어도 잘 하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나폴레옹의 군대에 끼어 들기도 하는데 이런 과정을 따라가며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운이 좋아 무사히 살아 집에 돌아오지만 그런 기질탓에 싸움에 또 휘말려 살인을 하고만다. 후.........소설을 읽는 독자로서 처음으로 주인공에게 동요되지 않았고 그가 어서 감옥에 갇히기만 빌었다. 도망자로써도 영 시원찮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국 살인죄로 감옥에 갇히는데 왠걸. 그곳에서 그는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진다. 많은 귀부인들이 그에게 빠져들고 그 역시 시험삼아 이런저런 연애사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이전까지는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가 감옥을 책임지는 장군의 딸을 마음에 두게 된 것이다.
마침 그가 갇힌 탑과 마주한 성곽의 한 공간에서 그녀가 새를 키우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국경 근처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 서로 안면만 있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이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치 로미오와 쥴리엣처럼 눈빛만으로 서로에게 매료되어 안타까운 사랑을 이어나간다. 발자크 플로베르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대가인 스탕달은 이탈리아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래서 치비타 베키아라는 곳의 주재 영사로도 지냈다는데 그 시기에 이 소설을 썼다. 실제로 파르네제 가문의 한 청년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담긴 기록을 보고 감명받아 이 소설을 만든 거라고 한다. 스탕달 특유의 세밀한 감정묘사와 유쾌한 장광설, 당시대에 관한 역사적 통찰과 정치적 풍자가 한가득이다. 읽는 내내 쉴틈이 없는데 지루할 틈도 없어 즐겁게 읽었다.
다양한 인물이 수없이 등장하고 궁궐에서 권력을 향한 무섭고도 유치한 암투가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런 사정들이 파브리스와 클렐리아의 사랑과 어우러져 예측불가능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개인적으로 별 10개를 주고 싶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작품을 두고 볼테르적인 아이러니와 프랑스적인 재치가 넘치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 이상의 소설을 앞으로 또 읽을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 스탕달의 필력에 흠뻑 취하고 싶은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지금 이 순간은 파브리스의 일생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이때 만약 누군가가 감옥에서 나가게 해주겠다고 했어도 그는 그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것도 단호히! - P99
이처럼 파브리스는 아주 작은 새장 같은 곳에 갇혀 사방으로 옥죄여 지내면서도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하루를 한 가지 문제 즉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이 몹시도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이리저리 궁리하며 대답을 찾아내는 데 바쳤다. 수없이 살펴보고 거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분석을 보태보아도 다시 끊임없이 부정되고 마는데, 그러면서 결국 도달한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그녀의 의식적인 몸짓은 모두 ‘아니‘라고 대답하지만, 무심코 보여주는 눈빛은 나에게 애정을 고백하고 있어.> - P101
그녀의 귓가로 바짝 다가서서 그는 낮은 소리로 마치 혼잣말처럼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두 구절을 속삭였다. 예전 마조레 호숫가에서, 비단 손수건에 적어 그녀에게 보냈던 그 소네트였다. <세상의 속인들이 나를 두고 불행하다 했을 때, 나는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그러나 지금 너무도 변해버린 내 운명이여!><아니야, 이 사람은 나를 결코 잊지 않았구나> 하고 클렐리아는깨달았다. 기쁨이 가득 밀려왔다. <이처럼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분이 변덕스러울 리는 없는 거야!>
아니에요, 내 마음 변하는 것을 보게 될 날은 없으리니,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준 아름다운 눈이여.
그러면서 클렐리아는 속으로 페트라르카의 이 두 구절을 읊는 것이었다- P322
이 노래 가사가 완전 파브리스와 클렐리아의 이야기다.
스탕달 전작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