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를 가졌던 사람이 되돌려주는 악의 만큼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사랑했던 사람의 살의만큼 간담 서늘한 것이 있을까?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 작품을 희곡으로 바꾸어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는데 그런 사정을 모르고 읽었지만 '희곡'처럼 읽혔다. 제한된 공간, 계약관계,사랑에 무지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자꾸만 잠드는 여자와 그 사실을 기이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남자와의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 긴장감의 이유는 무엇일까?
오고 가는 둘 사이의 대화가 어렴풋이 그들 각각을 드러낸다. 또한 잠재된 공포,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당신은 여자에게 묻는다. 죽음의 병이 어떤 점에서 치명적이지요? 여자가 대답한다. 이 병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병에 걸린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요. 또한 죽기 전에 삶을 가져보지 못한 채, 어떤 삶도 없이 죽는다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사람이 죽으리라는 점에서요. - P28
넷플릭스에 '러브,데스,로봇'이란 시리즈물이 있다. 다양한 기법의 에니메이션, 짧은 러닝타임과, 독특한 줄거리로 시즌3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이번 시즌 중 '히바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침 뒤라스의 이 작품을 읽기 하루전에 '히바로'를 봤는데 덕분에 조금 난해한 '죽음의 병'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것 같다. 숲에서 이동하던 중세시대 무장을 한 병사들. 그들 중 주인공인 한 병사는 귀가 들리지 않는지 동료가 그에게 수화로 대화한다. 그들은 근방에 있던 호수에 이르르고 그곳에 가라앉아 빛나는 금덩이를 발견해 줍는다. 이에 호수 가운데 잠들어 있던 황금을 두른 세이렌이 깨어나 특유의 비명으로 병사들을 현혹해 늪에 빠져 죽게 만든다. 그러나 주인공은 귀가 들리지 않아 홀로 살아남고 세이렌은 그를 뒤쫒는다.
당신은 사랑하는 감정이 어떻게 불시에 생겨날수 있느냐고 묻는다. 여자가 당신에게 대답한다. 어쩌면우주의 논리에 갑작스레 끼어든 어떤 균열 같은 것에서요. 여자가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실수 같은 것에서요. 여자가 말한다: 의지 같은 것에서는 절대로 생겨나지 않지요. 당신이 묻는다: 사랑하는 감정이 다른 것에서도 불시에 생겨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말해달라고 여자에게 애원한다. 여자가 말한다 : 모든 것에서요, 저 밤새의 비행에서, 어떤 잠에서, 잠 속의 어떤 꿈에서, 다가오는 죽음에서, 어떤 낱말에서, 어떤 죄악에서, 스스로, 저절로, 어떻게 생겨나는지 모른 채 갑자기. - P63
자신의 마법에 걸려들지 않는 이 병사에게 세이렌은 호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를 유혹하는데 그가 원한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녀의 몸을 가득 채운 보석이었다. 그로인해 이들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히바로'와 '죽음의 병' 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소통의 불가능과 그로인한 욕망의 한계, 사랑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남성적 섹슈얼리티는 자신의 욕망에 갇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죽음의 병은 사랑의 부재인것이다.
거짓 사랑은 쉽게 드러나는 반면, 진실한 사랑은 우연의 교착 속에, 막다른 골목 어딘가에서 생겨나, 필경 실패로 귀결될 실수처럼, 오로지 무지의 상태에서만, 그러니까 오로지 사고처럼 당도할 뿐이다. - P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