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지난 몇년간 읽은 소설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었다. 다 읽고 난뒤 바라본 표지 속 파도는 마치 읽는 내내 나를 두드리고 휘감은 감정의 파고와 같았다. 1600년 초 에도시대 농사짖기 힘든 척박한 골짜기에 하세쿠라로 불리우는 주인공 사무라이가 살고 있다. 그는 그 지역 일족의 총령이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 사는 수준으로 고되게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얼마 나지 않은 곡식은 연공으로 영주에게 거의다 바쳐야만 한다. 그런 와중에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의 유일한 어른이신 숙부는 사무라이를 찾아올때마다 비옥했던 과거 영지(구로카와)에 대한 미련을 기나긴 한탄으로 반복했다. 어느날 주군인 이시다로가 어쩌면 구로카와를 되찾을 수도 있다며 영주에게 가보라고 한다. 영주는 사무라이에게 이국풍의 대형 무역선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40여명의 남만인(서양인)들, 100명이 넘는 일본인 상인과 일꾼들과 함께 배를 타고 멕시코에 사절로 가서 통상제의를 담은 서한을 총독에게 전달하고 오라는 임무를 맡긴다. 왜 달변가도 중신도 아닌 하필 자신들같은 하위 계급을 먼 나라에 사절로 보내는 것일까? 의문을 가졌지만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내렸다. 저물녘, 구름 사이로 자갈투성이인 강가에 연한 빛을 비추던 하늘이 어두워지자 사위가 돌연 고요해졌다. 두 송이, 세 송이 눈발이 흩날렸다. 눈은 나무를 베고 있는 사무라이와 하인들의 일옷을 스치고, 덧없는 목숨을 호소하듯 그들의 얼굴이나 손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인간들이 묵묵히 손도끼만 움직이고 있으니 이제는 그들을 무시하듯 이리저리 주위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저녁 안개가 눈과 섞여 퍼지자 시야는 온통 잿빛이 되었다. P.7



바울회 선교사인 스페인출신 벨라스코 신부는 또한명의 주인공이다. 일본의 기리시탄(크리스천의 포르투칼어)박해에도 일본어에 능통해 살아남았다. 버림받은 나환자들을 위해 아사쿠사에서 병자들을 돌보던 그는 통역사로 이 사절단에 참여하게 된다. 신부라기보다 책략가에 가까운 그는 이번 임무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주교가 되어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당시 천주교는 베드로회와 바울회로 나뉘어 반목하고 있었는데 베드로회는 벨라스코가 몸 담은 바울회의 선교활동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로마 교황청등에 보고하곤했다. 반면 벨라스코는 베드로회의 일본에서의 과욕과 만행으로 인해 기리시탄이 탄압받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두 달이 넘는 항해와 몇차례의 폭풍을 통과해 멕시코에 도착한 사절단은 처음 마주하는 낯선 세상만큼이나 예상과 다른 그곳의 반응에 갖은 어려움을 겪게된다. 



베드로회의 수도사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능숙하게 조종하지 못한 데다 에도성에 파고들어 있는 불교 고승들을 회유하지도 못하고, 반대로 그런 요직에 있는 자들에게 반감과 의혹의 씨를 뿌렸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야심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주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P.25



물과 기름만큼 다른 성향의 사무라이와 벨라스코는 여정이 이어지는 동안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영주가 바라던 성과를 내기 위해 무려 4년간 이어진 긴 여정끝에 드디어 결실을 맺으려던 그때. 일본 현지의 급변한 정치상황이 서신으로 그들앞에 전달된다. 그로인해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사절단은 그제서야 서로에게 강한 유대와 동질감을 느낀다. 일본 사절들의 귀환을 위해 멕시코에 남게된 벨라스코를 제외하고 다시 험난한 항해끝에 사절단은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들 앞에는 과연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책을 읽어보시길.



골짜기의 밤은 깊었다. 골짜기의 밤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어둠과 어둠의 침묵을 모른다. 정적이란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적이란 뒤쪽 숲의 초목이 스치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는 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그리고 가만히 이로리의 작은 불꽃을 향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다. -P.463



껍데기에 갇힌 달팽이처럼 눈덮인 골짜기의 삶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업인줄 알고 살아가던 말 수가 적은 사무라이와 일본이란 나라의 포교를 삶의 목표로 살아오던 벨라스코 신부의 긴 여정 이야기가 수기형식으로 번갈아 이어지며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어디까지가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소설적 구현인지 후반에 실린 해설을 통해 대략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죽어있는 것을 살려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읽으며 체감한다. 작가가 살려낸 이야기는 독자의 '읽기'와 '공감'을 통해 비로소 맥이 흐르고 생명력을 얻는다. 더구나 역사적 사실들을 기반으로 작가가 창작으로 디테일을 첨가하면 그 생명력은 누군가의 심장에 귀를 대고 듣는 심장박동처럼 강력한 감각을 동반한다. 내 안에서 사무라이와 벨라스코, 요조는 다시 살아났고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나를 온통 흔들어놓았다.



거품을 일으키며 해변을 덮치는 파도가 옥졸이 떠내려 보낸 거적을 삼키고 부딪치며 물러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겨울 햇빛은 긴 모래사장에 내리쬐고 바다는 바람소리 속에 여전하게 펼쳐져 있다. 대울타리 안에 이제 관리나 옥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P.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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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6-10 22: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몇년 간 읽은 소설 중 가장 감동적이셨다니 미미님을 제대로 홀린 엔도 슈사쿠군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창작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감동을 이끌어내기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독자들 입장에서는 궁금해질법한 일이죠^^ 북플에 엔도 슈사쿠 바람이 한동안은 계속 이어질 것 같네요!ㅎㅎ

청아 2022-06-10 22:35   좋아요 4 | URL
‘소설이란 모름지기 이래야한다‘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라고 느꼈어요^^*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오열했고요ㅠㅠ
역사적 배경이 오히려 감동을 끌기 어려운 면도 있군요? 저같은 경우는 <침묵>도 처음엔 아예 다 창작인줄 알아서 더 놀랍더라구요ㅎㅎ슈사쿠 폭풍이 일었으면 좋겠어요!! 거리의 화가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새파랑 2022-06-10 22:4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너무 좋더라구요 ㅜㅜ 사실 선입견으로 종교적인 느낌이 강할까봐 손이 안갔었는데 침묵을 읽고 아주 놀랬습니다~!! 이 책도 고뇌가 너무 느껴지고 공감이 되더라구요. 역시 좋은 책은 서로 공유해서 읽어야 합니다 ^^

청아 2022-06-10 22:50   좋아요 6 | URL
작년에 리뷰가 몇개 올라오길래(새파랑님도 그때쯤 읽으신줄 알았어요)
사두었다가 이번에 읽으시길래 저도 꺼냈는데
오롯이 이야기속에 빠져서
저도 바다를 건너고 또..ㅠㅠ 이제라도 슈사쿠를 알아 다행입니다
좋은 문장도 너무 많죠^^*

alummii 2022-06-10 23: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무라이 사짜만 봐도 안 땡겼었는데 ㅋㅋ 급 읽고 싶어졌어요 ~~

청아 2022-06-10 23:14   좋아요 5 | URL
저도 사무라이시대 역사도 전혀 알지못해 이런 소설은 읽을일이 없을 줄 알았거든요. 나오는 이름들도 헷갈리고 낯설어서 이것저것 메모하며 읽었는데 어느순간부터였는지... 몰입도가 굉장한 소설입니다. 강추합니다^^*

유부만두 2022-06-10 23: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다 노부나가가 천주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영국과 밀약을 맺어 박해했다고 알고있었는데 이런 묘사로 읽으니 전혀 다른 풍경을 상상하게 됩니다.
.. 과연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청아 2022-06-10 23:39   좋아요 3 | URL
아마도 시기적으로 이 이야기는 영국과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밀약을 맺기 직전에 시작하는것 같아요. 일본의 급변하는 정치상황이 소설속 등장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데 제 가슴이 미어지는것 같았습니다. 표지가 소설과 너무 잘 어울립니다👍

독서괭 2022-06-10 23: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역시 지금 대세는 엔도 슈샤쿠군요.. 빨리 한권 정도 사야 하나(읽어야 하나가 아님).. 제가 작년에 북플에서 한창 <나는 고백한다> 대세일 때 샀다가 딱 1년만에 읽기 시작한 거더라구요 ㅋㅋ

유부만두 2022-06-10 23:34   좋아요 4 | URL
그게 벌써 작년 일이던가요? @.@

독서괭 2022-06-10 23:36   좋아요 2 | URL
네 제가 딱 1년 전에 샀다고 페이퍼 썼더라구요 북플이 알려줬어요 ㅎㅎ

청아 2022-06-10 23:42   좋아요 5 | URL
저도 일단 이거다싶으면 사서 쟁여둡니다ㅋㅋㅋ
<나는 고백한다>저도 그때 사서 아직도 못읽고 있네요.(3권짜리라 아무래도 부담이..)올해는 꼭 읽고싶어요!!

청아 2022-06-10 23:43   좋아요 3 | URL
북플 너~무 친절합니다ㅋㅋㅋ뜨끔뜨끔 하라고ㅋㅋ

독서괭 2022-06-10 23:45   좋아요 4 | URL
미미님 잡으면 금방 읽으실 거예요~^^

다락방 2022-06-16 09:19   좋아요 2 | URL
ㅋㅋ 저도 그 때 <나는 고백한다> 사서 아직 가지고만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2-06-11 00: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읽을 때, 글과 마음이 같이 움직였어요. 책에 푹 빠져 읽었습니다.
문장의 울림도 좋고 종교에 대한 이중성도 보았고 허무적인 인간의 삶도요.
사람마다 선택은 다르고, 그 결과로 우리는 각자의 길로 가고~~
그래서 사무라이의 마지막이 슬프면서도 빛났던 것 같아오^^

청아 2022-06-11 13:05   좋아요 5 | URL
그렇죠!! 학의 죽음같은 복선들, 고조되는 분위기등 드라마틱한 장치들도 한 몫 한것 같아요 <침묵>과는 또 다른 고뇌와 슬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슈사쿠의 다른 작품들도 다 기대됩니다*^^*

mini74 2022-06-11 2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도 슈사쿠바라기! ? 미미님의 감동이 파도처럼 담긴 리뷰네요 *^^*

청아 2022-06-11 20:51   좋아요 2 | URL
으아 미니님!! 읽고나서 잠도설칠 정도로 많이 몰입했던 소설이었어요~♡ 등장인물 여럿에게 공감이되어 작품안에서 마치 제가 함께했던 기분이었습니다😭

물감 2022-06-11 2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작가님이 자주보이네요? 저도 유행을 타봐야 겠습니다 ㅎㅎ

청아 2022-06-11 23:31   좋아요 3 | URL
네 물감님!! ㅎㅎ 이 작품은 호불호가 크게 갈릴것 같지 않아서 물감님도 좋아하실거예요. 저에게는 인생소설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희선 2022-06-12 02: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과 한국(조선) 종교 탄압이 있었던 게 비슷하면서 다를 듯합니다 종교가 아닌 학문이나 다른 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는 거였다면 누군가 죽거나 하지 않았을지, 그런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하네요


희선

청아 2022-06-12 08:43   좋아요 2 | URL
네!! 그러고보면 이렇게 소설로 역사공부를 하는것도 꽤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역시 정치적 문제도 얽혔을텐데 그 부분도 궁금합니다. 희선님 말씀하신 학문이나 문화도 역시 많이 달라서 제 생각엔 여러문제에 부딪혔을것 같아요😅

scott 2022-06-16 0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엔도 에세이 추천 합니다!ㅎㅎ

한국에 이분의 작품이 그다지 많이 번역 되어 있지 않다는게
안타까울 뿐 ^^

청아 2022-06-16 07:52   좋아요 2 | URL
스콧님이 추천하시니
에세이도 모두 담아놓겠습니다!!ㅎㅎ

나머지도 하루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슈사쿠의
세계에 이제라도 입문해서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