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어쩌면 '나'라는 우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이라는 우주를 이해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신을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관대하고 이해도가 높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해 안가는 사람, 이해 안되는 생각, 이해 안되는 것들 투성인 사람은 우선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유독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소설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음껏 만나 경험하고 나를 반추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데도 거기에 그런 유익이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합니다. 또는 읽더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감흥이 없습니다.
사람 마음에는 판사가 한명씩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원고로 지지해주는 검사도 있고 타인을 위한 변호사도 존재합니다. 검사와 변호사의 다툼을 보고 판사는 결과를 내립니다. 이 재판이 늘 공정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본래 자신에게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검사는 본인이기에 자료가 넘쳐 납니다. 나의 성장과정, 나의 기쁨과 슬픔, 상처, 성취같은 나의 역사를 모두 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타인을 위한 변호사는 나의 노력여하에 따라 자료가 충분할 수도 턱없이 부실할수도 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노력, 또는 소설이란 도구를 활용해 간접적으로 타인들의 세계에 대해 들여다보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경험치가 쌓일수록 변호사의 자료는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좋은 판결의 밑거름이 됩니다.
주변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 투성이라면 내가 타인의 마음을 경청하는 인간인지, 또는 소설을 읽어 간접적인 경청을 하는 인간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무지는 적극적인 무경청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모르고 있는 이유는 대개 한 가지뿐입니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p.7 푸코, 바르트, 라캉 쉽게 읽기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기 안에서만 타자를 인식하며, 그렇지만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하는 존재이다. p.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