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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네메시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율법(律法)의 여신.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을 분배한다고 한다.(출:표준국어대사전) ,네메시스에는 정당한 분노라는 의미도 있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였는데 몸이 돌덩이 처럼 무거워 13시간이상 잠을 잤다. 몸은 더 자야한다고 부르짓는 것 같았지만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억지로 눈을뜨고 하루를 그렇게 늦게 시작했는데 계속 피로가 쏟아지고 컨디션이 그야말로 메롱이었다. '아 이렇게 건강 적신호가 온 것인가? 무슨 큰 병에 걸린거 아닌가?'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 죽음이 그렇듯 질병도 예고가 없다는 당연하고도 불길한 생각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크리스마스날 몸이 마치 늘어진 시루떡처럼 늘어지고 무거우니 피곤하면서도 우울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날 늦은 시간에 드라이브를 나가게 되어 먹은 멀미약이 떠올랐다.
나는 자가용 멀미를 하는 편인데 굳이 자가용 멀미라고 한 까닭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멀미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촌동생이 운전하는 차에서는 전혀 멀미를 안하는걸 보면 짝꿍이의 험한 드라이브 성향 탓인것도 같지만 딱 뭐라고 원인을 입증할 수 없기에 되도록 멀미약을 구비해두고 차를 탈때마다 먹는 편이다. 두 세가지 제약사의 멀미약을 넉넉히 사두었는데 그 중의 한 가지는 약호가 느린대신 독한 편이라 절반을 나눠 먹던 것을 그만깜빡하고 한 알을 다 먹었던 것이다. 원인을 알고나니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잠시 지옥 입구 손잡이를 잡았다가 돌아서 온 기분이었다.
우리는 어디가 아프거나 또는 누군가가 가까운 이가 아파하는 것을 보면 그제서야 아프지 않은 상태에 겸허해지고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 누군가는 아픔과 고통을 신이 우리에게 내린 벌이라고 생각한다. 장기적인 코로나 사태에 전세계인이 일상의 소소한 자유로움을 일깨우게 된 동시에 환경이 인간에게 경고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듯이 말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과 많이 비슷하다. 단지 역사적 과거인 1944년이라는 제 2차 세계대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어른들보다는 아이들에게 더 치명적인 폴리오라는 전염병을 매개로 했다는 점과 유행시기가 여름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캔터 선생님은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체육교사다. 친모는 그를 낳다가 죽고 아버지는 절도를 하다 걸려 감옥살이를 했다 다정하고 훌륭한 외조부모덕에 올바르게 자라 건실한 청년이 되어 교사가 된 것인데 낮은 시력탓에 전쟁상황이었지만 군에 징집되지는 못한 상태다. 그런 캔터 선생앞에 어느날 폴리오에 감염된 듯한 이탈리아계 청년들이 병을 옮기러 왔다며 놀이터에 나타난다. 바닥에 침을 밷는 등 도발하는 그들을 캔터 선생이 10대 1의 상황에서 차분하게 돌려보내자 아이들에게는 영웅이되고 지역에서 더욱 존경받게 된다. 하지만 그의 지도하에 있던 아이들이 이후 하나둘 폴리오에 걸려 사망하게 되며 감염자가 급격히 늘자 그는 괴로워하며 심란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중 안전한 타 지역 여름캠프에서 역시 아이들을 인솔하던 여자친구가 공석이 생겼다며 그쪽으로 오라는 제안을 한다. 체력적인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시력탓이지만 징집되지 못한채 남았다는 굴욕과 폴리오로 아끼던 제자들이 입원하고 죽어감으로써 자책하던 그는 결국 여자친구가 있는 곳으로 떠난다. 자신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해주는 여자친구와 안정적인 일자리,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한 곳에서 자신을 따르는 새로운 아이들을 앞에두고 무책임하게 이곳으로 온 것을 그는 곧 후회하게 되는데 그런 그에게 불행이 파도처럼 몰려오게 된다.
사람의 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캔터 선생님이 자신이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p.243
불행한 상황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된다. 자포자기하거나 누군가를 탓하고 비난할수도 있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도 있다. 물론 실제 상황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듯이 보다 복잡한 것들이 얽혀있어 단정적으로 어느쪽이 옳다고 확신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상황에 매몰되지 않을 필요는 있어 보인다. 필립로스는 이 소설을 통해 그런 상황을 눈앞에 그려 볼 것을 제안한다.
˝두려움이 덜할수록 좋아. 두려움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어, 두려움은 우리를 타락시켜, 두려움을 줄이는 것, 그게 자네의 일이고 내 일이야.˝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