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식탁 위로 몸을 구부려 턱을 손에 괴었다.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 하겠지만,
저녁을 함께 먹고 카드를 몇 번 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ㅡP9
단편을 선호하지 않는다. 짧막한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읽다보면 앞서 읽은 내용에 대한 감정이 모두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후기를 쓰려고 할때 이 점은 더없이 난감한 부분이다. 그래서 되도록 각 스토리를 읽기전 제목에 집중을 하곤한다. 그렇게 읽다 보면 다 읽은 뒤 제목을 훑으며 어느정도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각 단편마다 시간차를 두는 것도 좋다. 아마도 단편을 읽는 나름의 노하우가 사람마다 있을 것이다. 호흡이 긴 장편에 비해 이런 별도의 노력이 필요한 단편이 나에게는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제임스 설터를 읽기 전까지.
부엌의 불빛 아래에서 보니 그는 밤새 일한 기자처럼 그냥 초췌한 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서, 그 노려보는 눈빛에서 이성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심란했다. 그의 한쪽 콧구멍은 다른 쪽보다 작았다. 그는 자기가 막무가내라는 사실에 익숙했다. 아디스는 그가 자기를 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이마엔 유난히 반짝이는 두 부분이 있었다. 뿔이 돋아나려는 듯했다. 남자들은 그들을 무서워하는 여자에게 끌리는가? ㅡ P51
제임스 설터의 문장에는 찰나의 통찰, 좀더 과장하자면 그가 만든 가상의 현실의 정수가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미학적인 문장을 만들어내려 굳이 애쓰지 않는데도 미학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짧고 간결한 문장과 대화. 그 안에서 오고가는 인물들의 감정과 태도는 많은 설명이 덧붙여지지 않은 대신에 일종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듯 하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상황들. 마치 예측불허의 재즈나 탱고선율을 글로 읽어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한 번 읽고 덮기에는 아쉬움이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날 오후를 기억한다. 흐리고 조용한 오후였는데, 그의 시를 읽는 순간, 기존의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일상적으로 느끼던 방식이나 삶의 깊이(다른 적당한 표현이 없다)에 대한 생각들로부터 멀어지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느끼던 흥분을 기억하고 있다. 그의 시는 귀에 거슬리는, 끝도없이 계속되는 아리아였다. 특별한 건 그 톤이었다. 마치 그늘 속에서 써 내려간 듯했다. 저기 삼각주가 있다. 저기 불타는 팔이 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그게 굽이가 풀어지는 강을 묘사한 게 아니라 욕망에 관한 것임을 바로 알 수있었다. 시는 어떤 꿈처럼 천천히, 종려나무 잎에서 파닥거리는 빛, 이름과 명사를 통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 P95
이 책의 번역자는 개인적으로 제임스 설터를 몇 번 만났고 그의 원서(이 책의 단편 중'포기')를 읽은 뒤 요청을 받지도 않았는데 번역을 해서 출판사에 보냈다고한다.당돌하고 멋지다. 그녀도 나처럼 설터의 단편을 읽고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덕분에 이 출판사에서 두 권의 설터의 작품을 그녀에게 맡겼다. (어젯밤,가벼운 나날들) 마음산책에서 8권의 설터의 책을 펴냈는데 제임스 설터만의 느낌을 잘 살린 표지 디자인들도 각각 눈길을 끈다. 책을 다 덮기전에 마음이 급해져 다른 책들을 주문해버렸다.
타이트하게 전개되다가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이 머리를 치는 이 작품은 단편소설사에 남을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설터는 언젠가 이 책에 대한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기억하는 것들이다"라는 장 르누아르 감독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ㅡ P210, 옮긴이
제임스 설터는 1925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1,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사냥꾼들'은 한국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공군에서 근무한 그는 퇴근 후 집필을 이어가다가 전업작가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 90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오랜 기간 놓지 않고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작가들을 더욱 존경한다. 그는 젊었을 때 꽤나 배우같은 강하고 준수한 외모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분위기를 주는 첫번째 사진은 이 책에 실린 작가사진이고, 두 번째는 좀 더 나이들어 찍은 듯한 중년의 모습인데 뉴욕 타임스에 실린 기사에서 퍼왔다. 역시나 수트를 입은 탓인지 젠틀한 느낌이다. (출처:https://www.nytimes.com/) 설터는 영화 각본도 몇 편 썼는데 영화 '다운힐 레이서'의 인연으로 만난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한 사진 (출처: https://www.theparisreview.org)을 마지막으로 올려본다.